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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 Aug 28. 2016

남자가 예민해 질 때

연애가 어느 정도 성숙기에 접어 들면  '이 사람(혹은 이 자식)이 내가 편해졌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시점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남자가 예민해 질 때'다. 물론 남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예민해 질 때도 있다. 그것이 내게 가감없이 보여 질 때, 내게 이해를 구하며 그 예민과 짜증을 한없이 받아주길 바랄 때 '우리가 서로 편하긴 하구나'하는 사실이 매우 강렬히 와닿는다.






일 하는 당신은 멋있다. 매력있다.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써도 섹시하다. 그런데, "일 하느라 바빴잖아"가 변명이 될 때는 그렇게 미울 수가 없다.






"오빠 일 하잖아" 라는 말의 불가항성


난 아직 대학의 울타리 안에 안전히 살고 있다. 정글에 먼저 뛰어든 것은 남자친구였는데, 워낙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보니 누구보다 바쁘고 치열하게 살고 있다. 때론 '저 와중에 나랑 연애를 하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CC에서 [직장인-학생] 커플이 되면서 예전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국지전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것'이 연애라고 했던가. 적어도 내게는 '시간이 더 많은 쪽이 지는 것'이 연애다. "오빠 일 하느라 바쁘잖아"하는 말 한 마디면 나는 어떠한 반항도,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항상 아쉬운 쪽은 나였고, 그 때마다 그저 "학생인게 죄지." 했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였다. 한국에 발을 딛자마자 통화를 시도했으나, 바쁜 탓에 서로의 목소리가 닿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 도착시간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전화 한 통 먼저 안 하는지 심술이 났다. 몇 분 지나 목소리가 들렸을 땐 괜히 심술부렸다. "오빠 미팅하고 있었어. 오늘 평일이잖아. 일 하는 날." 안다. 잘 안다고. 매우 잘 알아서 반박을 못하니까 내가 더 분한거다.


항상 사랑받고 싶은 나는, 꽤 어리숙한 것들에 자존심을 건다. 1. 친구에게 밀렸을 때, 2. 일에 밀렸을 때, 3. 그냥 귀차니즘에 밀렸을 때. 특히 3번 같은 경우는 용서도, 이해도 안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1,2번의 경우는 뭐라 투정을 부리자니 어린 티를 팍팍 내는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내 속만 썩는다. 일을 시작한 뒤로 '일'의 위력이 정말 방대해 졌는데, 모든 행동의 인과가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나게 됐다.


'일 하느라 바빴다는 것'이 기본 개념이라고 하면, '일 하느라 바빠서 그동안 친구들 못 만났잖아. 오랜만에 얼굴 좀 봐야지.'는 응용1번 이다. 실제로 이 말은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남자친구가 일본에 다녀오고 러시아에 다녀오면서 약 3주만에 만나게 된 날 저녁에 던진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아침 친구들과 1박 2일 캠핑을 떠났다. 


그래도 남자친구는 일 하면서도 나를 매우 위해주고, 챙겨주는 편이다. 어딜 갈 때면 항상 내 것 하나는 챙겨왔고, 주말이 되면 항상 나를 보려고 했다. 나를 보는 것으로 힐링이 된다나. 그런데 아주 가-끔 예외가 있었는데, 평일에 너무 고되서 그런지 데이트를 고되게 할 때다. '아니, 날 보는 것이 힐링이라며?'하지만, 이해가 안되거나 너무 섭섭해 화가 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이게 응용 2번이 될 때는 조금 '당신, 좀 위험해'싶다. 

통화하면서 '일이 너무 힘들어'하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릴 때가 많아졌고, 그로 인해서 '오빠 안그래도 힘든데, 우리 더 싸우지 말자'라고 할 때. 데이트를 하면서 잔투정이 많아지고 사소한 것에 짜증을 낼 때. 의외로 남자들은 일과 연애를 구분하기 힘든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일 할 때 연애로 힘든 것들을 티내지 않는 것은 꽤나 잘 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그것은 타인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체면이나 이미지 때문일 지도.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여자친구를 만날 때 일로 인한 짜증과 힘듦은 여과없이 비춰진다. '여자친구에게 이런 것 의지하고 힐링 받는거지'하지만 여자친구는 도대체 무슨 죄일까. 감정의 공과 사 구분. 연애에서는 이 것이 가히 핵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남자(혹은 여자)친구가 상대에게 위로받기 위해 투정 부릴 순 있으나 그로 인해 여자친구로 하여금 데이트가 고되다고 느껴지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당신과 나의 시간은 유혹의 연속이었다. 당신을 여러가지 모습으로 홀려내는 것. 나는 우리의 관계 속에서 매번 다양한 유혹의 미션을 받는다. 





호랑이 잡는 담비



언젠가 이 일로 삼촌과 이야기 했던 때가 있다. 


"삼촌, 일이 힘든 건 아는데 일이 힘들다고 여자친구한테 과하게 투정부리거나 예민하게 구는 것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까?"


삼촌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이해 못 할 것 같으면 헤어져야지. 그런데 하나도 이해하지 말라고 할 순 없어. 지금은 네가 학생이라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것 같아도 너도 직장인 되고 나면 분명 너도 똑같이 그럴 거 거든."


역시나 결론은 '나도 직장인이 되어 봐야 안다'가 되는 것일까. 그런데 이 결론은 너무 비합리적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연애를 하는데, 서로의 상황이 다르다고 해서 그 다름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 간의 침묵 후에 삼촌이 이어 말했다.


"네가 여우처럼 휘어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딱 잘라 정리를 하던가. 그런게 아니라면 서로 무언가 타협을 봐야지. 이야기 해봐."


대화와 타협. 매우 민주적인 방법이지 않은가. 그러나 수많은 대화와 타협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으니 18살 차이나는 삼촌을 붙잡고 세월의 지혜를 묻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한 가지 말이 꽂혔다. "여우처럼 휘어 잡을 것"


내 타고난 성정은 여우가 되지 못했다. 제법 눈치있다는 소리는 들어봤으나 그것은 '일머리 있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얍삭빠르고 눈치빠르게 행동하는 성격이 못됐다. 남들이 다 '저 것 여우짓 하는 거 봐'하고 말 할 때 나 혼자 "저게 왜?"하고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나였다. 친구들이 갖은 애교와 여우짓(?)으로 남자친구에게 선물을 받아 낼 수 있는 스킬을 전수 받고도 정작 남자친구에게 스킬을 시전했을 때 

"속 보인다 제희야"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나였다. 그만큼 나는, 소위 말하는 여우짓의 적성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여우짓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지긴 싫은데 여우처럼 휘어 잡지 않으면 내가 고생할 것 같았다. 이럴 때 여우띠 친구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애학을 전공하고 남성심리를 부전공으로 둔 친구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일 하느라 짜증이 많아진 남자친구를 달래는 법>은 어려운 과제였다. "날 만나는게 힐링인데 뭐가 더 필요해?"하니, 말 다했다. 


한 동안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책으로 연애를 배우자니 4년 연애한 자존심이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굴하지 않았다. 어떻게면 휘어잡나 고민하는 사이에도 남자친구와는 몇 차례 국지전을 펼쳤고, 수류탄을 한 4개 쯤 맞아 가슴이 뻥뻥 뚫렸다. 스트레스 게이지가 머리 끝까지 채워질 때 '에라이, 모르겠다'하고 로맨스 소설을 집어 들었다. 그 땐 몰랐다. 로맨스 소설이 내게 성경책이 될 줄은.


작은 고백을 하자면, 나는 로맨스소설 광이다. 지금 내가 글을 쓰는 모든 필력은 로맨스 소설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날 집어든 책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매 분, 매 초가 정해져있는 재벌 남자와 사귀면서도 남자의 마음을 휘어잡은 여자. 바쁜 남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또 잘 기다릴 줄 아는 지혜로움. 일에 지친 연인을 달래는 그 여우 스킬까지. 내 롤모델이 바로 침대 옆에 있었다. 소설을 읽으며 마음에 와닿는 대사들을 적었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어떨 때 이 대사를 멋있게 날릴 것인지 대사 장면도 정해뒀다.  


얻은 것은 간드러지는 대사만이 아니었다. 그저 가슴 저린 러브스토리가 주는 쾌락에 젖어 읽던 소설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들이 얼마나 현명한지, 얼마나 지혜롭고 당차고 용기있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마음을 다잡는지, 사랑하는 남자를 어떻게 믿어 주는 지. 이에 친구는 "이젠 하다 하다 너 조차도 연애를 글로 배우니?"했다. 이렇게 내 연애가 해피엔딩, 아니 해피하게 이어져 갈 수 있다면 로맨스 소설 1000권 쯤은 기꺼이 더 읽을 수 있었다. 


책으로 배운 여우스킬의 위력은 머지 않아 체험하게 됐다. 저녁식사 때를 지나서 만난 남자친구와 나는 만나자 마자 얼마 안되어 언성이 높아졌다. 그 날 하루만 미팅을 3개를 하고 온 그는 매우 피곤해 했다. "오빠 조금 피곤하다고 했으니까, 그냥 편하게 영화나 볼까?" 그런데 서로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다. "오빠 해야 할 일 좀 남아있으면 카페 갈까? 난 오빠 옆에 앉아서 책 읽는 것도 좋은데." 오빠는 뭘 해도 좋다며 내게 선택하라고 했다. 몇 가지 대안을 더 내놓자 오빠는 짜증을 냈다. "오빠는 선택하는게 너무 싫어. 아무 것도 고민하고 싶지 않은데, 그냥 네가 알아서 결정하면 안돼? 오빠는 뭘 하던지 다 좋아." 우리는 카페로 향했다. 내 기분은 한껏 상했다. 말을 이렇게 밖에 못하나 싶어 속상했다. 괜히 만지작 거리던 핸드폰을 보니 소설 대사들이 한껏 쓰여져 있었다. 이 때 였다. 내가 바로 '이 짜증'을 고치려고 로맨스 소설 읽으며 여우짓을 연마했던 것을 잊었었다. 카페로 향하는 길, 오빠는 내게 짜증낸 것이 미안했는지 내게 짜증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아니야. 오빠를 알게 되서 기쁘고 오빠를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아. 오빠가 겉으로는 엄청 쿨하고 멋진 남자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이해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여린 남자라는 걸 알아서 좋아. 이건 나만 알고 있는 것이잖아. 조금은 속상하지만, 그래도 나만 알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니까, 오빠를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아"



내 뱉는 내내 어찌나 손과 발이 오그라 들던지.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남자친구를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분명히 들었다. 내게 고맙다고 하는 말 틈으로 느껴진 감동을. 카페에 도착하자 남자친구는 커피를 주문하고 내가 좋아하는 조각 케익도 덩달아 주문했다. 내 맞은 편에 마주 앉아 노트북을 켜고서는 잠깐 멍하니 있더니 아예 노트북을 들고 내 옆으로 붙어 앉았다. 나를 자신에게 한껏 밀착시키고는 내 오른 팔을 자신의 왼팔에 걸어 팔짱을 끼게 만들었다. 


"으잉? 안 불편하겠어?"

"힐링 중이니 가만히 있어. 지금 재충전 중이야."


나는 그렇게 남자친구의 왼편에 기대어 읽다만 책을 집어 들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아까 짜증내서 미안해. 내가 오늘 너무 피곤해서 그랬나봐."


혀 끝에서 레드벨벳 케익이 녹아 들었다. 입 안에서 퍼지는 아메리카노의 향이 온 몸을 휘어 감았다.

남자친구에게 기대어 책을 읽는 그 때 카페 안의 모든 것은 빛이 났고 아늑했다.


남자친구는 일 하면서 힘들었던 것들을 내게 풀어냈다. 나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우리 오빠 많이 힘들었겠다. 고생많았어."하고 대답했다. 뽀뽀도 해주고. 가끔 안아도 주고.

일이 잘 안풀려 고민하자 "때려 쳐. 까짓꺼 먹여 살리지. 내가 능력이 좀 많아? 셔터맨 그거, 내가 시켜줄게" 하고 말해줬다. 아직 취업도 안했으면서. 그 날, 남자친구는 어리광쟁이가 됐다. 짜증 따위 부릴 줄 모르는 남자 같았다. 










아직도 나는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 마다 꽤나 '먹힐' 것 같은 대사를 모은다. 메신저로, 통화로 시도 때도 없이 달달한 말로 남자친구 가슴을 폭격한다.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도 무언가 "어라?"할 때면 남자친구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오늘 친구와 남자친구 이야기를 했는데, 오빠가 생각났어.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 남자를 만났을까? 오빠가 이렇게 멋있고 완벽한 남자라는 걸 나만 알아야 하는데. 남들이 알아볼까 겁나네. 오늘도 여자 조심, 여우 조심! 요즘은 남자도 조심해야 한다더라. 난 남자랑 경쟁하고 싶지 않아."




손자병법에 이런 말이 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전술이다"

나는 역시 제갈 공명의 후손이었다.






얼마 후, 나를 굉장히 챙겨주시는 남자친구의 선배와 통화를 했다. 

이 사건(?)을 이야기 했더니, 한 마디 하신다.

"제희 무서운 여자네. 호랑이 잡는 담비네 아주."

"어때요, 현명한거지."

"고 자식 이제 정신을 못 차리겠구만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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