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적 인간, 고로 우리는 연애를 갈망한다
좋아하는 이서희 작가는 <관능적인 삶>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애는)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쾌락 중 하나이며 영감이자 감각의 증폭제다. 삶의 깊고 뜨거운 주름이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하면서 울리는 나와 네가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다. 그래서 나는 연애를 하고, 연애를 듣고, 연애를 말하며, 연애를 보고, 또 연애를 쓴다. 나는 연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는 연애를 갈망한다. 현재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연애의 '달달함'이 멈추지 않길 바라며(=애인의 애교가 멈추지 않길 바라며), 내 연애의 온도는 항상 뜨겁길 바란다. 항상, 언제나, 끊임없이 서로를 향한 욕망과 갈증의 역치가 매번 다른 차원의 것으로 발전하길 바란다.
이따금 혼자만의 자유를 외쳐대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연인이 없을 때는 친구로는 채워지지 않은 어떤 공허함과 외로움에 사무쳐 내 옆에 꽁꽁 묶어 둘 연인을 욕망한다. 주변을 보면 세상엔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여성과 남성이 수두룩 한 것 같은데, 정작 내 짝이 될 어떤 여성이나 남성을 찾기란 힘들다. 여자와 남자 모두, 우리는 소설같은 연애담의 주인공이 되길 원한다. 자신의 연애담이 남들에게서 감탄을 자아내는 어떤 환상적인 로맨스가 되었을 때의 쾌감은 연애를 사랑하고, 사랑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로망일 것이다.
코 끝을 스며드는 공기가 차가워졌다. 스타킹으로는 더이상 다리의 추위를 막을 수 없고, 아우터의 두께가 눈에 띄게 두꺼워졌다. 패딩점퍼나 무스탕을 입어도 될 정도가 됐다. 남들보다 유독 길었던 중간고사가 끝났다. 한껏 여유를 부릴 작정으로 도서관에 가려는데, 딱히 할 일이 없었던 한 친구가 날 따라 도서관에 향했다. 빌릴 책을 한 아름 써 둔 리스트를 팔랑거리며 좋아하는 날 보더니 "그래. 넌 신날만도 하지." 했다. 캠퍼스에 돌아다니는 커플들을 보더니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연애가 공산주의였으면 좋겠어."
"누구보다 연애는 자유지상주의여야한다고 외쳤던거 아니야? 왜, 여자들이 안만나줘?"
"정부가 나한테 '너 이 여자 만나!' 하고 정해주면, 나는 여자 만나느라 시간 안써도 되지, 돈 안써도 되지, 여자 꼬시느라 별별 노력 안해도 되지. 얼마나 좋아?"
"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해야 한다면? 그건 재앙이지!"
"음, 그건 그렇지. 아 모르겠어. 연애 좀 하고 싶다."
'연애 공산주의'를 외치는 이 친구(자식)은 단지 연애를 위해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들이겠다는 경건한 자세 따위 없었다. 그저 '생물학적 여자면 된다'는 식으로 날로 먹겠다는 심보인데, 얼마나 여자들에게 '까였으면' 이럴까 싶기도 해 가슴 한 편으로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봄은 여자를 외롭게 하고, 가을은 남자를 외롭게 한다는 말은 과연 정설이었을까. 최근들어 연애가 간절해지는 사람들을 흔하게 발견한다. 그러니까, 모태솔로의 한 인 듯 1년 365일 연애를 울부 짖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이 사람이 연애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애에 무관심 했던 것 같은 사람이 연애를 갈망한다. 뭐, 연애는 문명사회에서 인류 번식의 전초전 혹은 전야제 같은 과정이니 번식본능을 가진 인간이 연애를 갈망하는 것 또한 본능일지도.
어쨌거나 얼마전 연애 따위에 전혀 관심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이 내게 상담을 요청했다. 마치 3.9년의 연애를 박사학위마냥 설쳐대는 내게라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보니 또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래요.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이야기를 쭉 듣고, 고민하고, 묘수를 찾아봤지만 안타깝게도 내 진단은 '사망선고' 였다. 그는 생존률 3%의 암 3기 말 썸을 가지고 와 수술을 요청했다. 그가 가진 마지막 한 수가 '신의 한 수'가 되길 바랬지만 신은 돕지 않았다. 아마도 신이 당신을 계획할 때, 2016년 1월 부터 10월의 일정에 연애를 넣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문득 '사람들은 왜 연애를 하고 싶어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하는 입장에서 마땅히(?) 해야 할 생각은 아닌데, 하도 주변에서 연애를 갈망하니 그 근원의 심리가 궁금해졌다. 내게 '그럼 너는?'하고 반문하면 나라고 딱히 현답이 나오진 않는다. 내가 이 남자를 처음 만난 후로 한 시간, 한 시간 마다 나는 그에게 빠져들었다. 좀 변태스럽지만 '27살'이라는 나이가 좋았고, 사진을 잘 찍는 것이 매력있었으며, 또 더 잘하려는 노력이 섹시했다. 180cm에 다다르는 키, 유니클로의 바지를 줄이지 않아도 되는 다리 길이와 곧게 뻗은 손가락과 발가락, 제우스를 연상시키는 완벽한 역삼각형을 이뤄내는 어깨와 허리의 비율. '이 남자를 사랑해야돼. 그래야만 해.'라는 주문이 귓가에 맴돌았고, 그렇게 최면에 걸린듯 온갖 끼를 부리고 없는 페로몬까지 모아 뿌려 대며 연애를 시작했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연애를 갈망하는 것에 대해 내 경험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 남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할 무렵, 나는 오히려 '연애가 굳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학에 온 뒤로 홍수처럼 불어난 사람관계가 재밌었고, 그들과 무언가를 해내고, 함께 여행을 다니고, 또 나 혼자 여기 저기 쏘다니는 자유를 온몸으로 만끽했다. 연애를 시작하면, 남자친구라는 존재가 내 자유를 침범할 것이고, 사람관계에 간섭할 것이고, 연애에 내 자유를 '할애' 해야 한다는 걱정에 연애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연애는 내 자유를 속박하는,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현 남자친구를 만난거다. 이 모든 고민들이 부질없고, 쓸데 없는 것이었다는 건 "나랑 연애할래요?"라고 고백하기 1초 전에 깨달았다.
'썸 사망선고'를 내린 사람에게 "왜 연애가 하고 싶어요?"하고 물었다. 사망선고 직후라 욕도 많이 얻어 먹었고.
"누군가랑 내 일상을 공유하면서 서로 챙겨주고, 챙김 받고 싶어."
"친구랑도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연애를 하면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 친구랑은 그런게 안되지."
"남자끼리는 싫다, 이런 것 말고."
"친구랑도 할 순 있겠지만, 그게 행복하진 않아."
"아 왜. 듣는 친구 섭섭하게."
"그냥 행복감이 들지 않아. 친구랑은 같은 연구실이니 매일 보고, 매일 뭘 같이 하고, 재밌는데 따뜻한 느낌의 행복이 아니야. '행복'이라는 단어에도 다양한 느낌이 있잖아. 친구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
썸-사망남 외에도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연애가 하고 싶은 이유'를 물었을 때 대체적으로 답은 비슷했다. 평상시에 지속적으로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고, 이해해 주고, 무슨 말을 해도 척척 알아 듣고, 위로해주는 온전한 내 편. 그리고 그(혹은 그녀)와 '달달함'을 느끼고 싶은 것.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에 의하면, 서른 즈음 되서 직장을 갖게 되니 '결혼'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지쳐 쓰러질 때. 날 반겨주는 누가 있고, 방 안이 따뜻하고, 함께 맥주한 잔 마시며 야식도 먹고 싶은 '아내'가 필요하단다. 친구가 아닌 아내가.
"왜요?"
(바보 같은 말이겠지만)그 역할을 친구가 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힘든 하루, 서로 상사를 욕하며 맥주 한 잔 마실 수 있지 않나. 보통 결혼한 사람들은 친구들과의 시간을 매우, 그리워하던데.
"내 생활을 함께하는 응원군. 평생 내가 의지할 수 있다는 안도감. 그런거지. 그래서 결혼은 특권이고 특혜야.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것이니까."
이 남자가 탐이날 정도로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인건지, 혹은 보통의 모든 남자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우자는 친구와 다른 차원의 응원과 위로를 건넨다고 말했다.
결국 '연애가 하고 싶다'는건 내 옆에 찰싹 붙어서 응원해주고 위로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거다. 친구와는 차원이 다르고, 가족아닌 가족같은.
나는 연애를 시작하고 난 뒤에 더욱 연애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연애가 주는 '달달함'이 멈추지 않길 바랬으며, 내 연애의 온도는 항상 뜨겁길 바랬다. 항상, 언제나, 끊임없이 서로를 향한 욕망과 갈증의 역치가 매번 다른 차원의 것으로 발전하길 원했다. 연애하지 않는 이들이 그토록 바라는 '챙겨주고 챙김받음'도 당연히 연애를 계속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친구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고민과 남친에게 말할 수 있는 고민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실제로도 나는 그렇다. 같은 이야기여도 말과 내용의 깊이가 달랐고, 감정의 솔직함이 달랐다. 진로나 취업에 대해 고민할 때, 친구와 이야기하면 '이 친구도 힘든 무언가가 있을텐데' 하고 배려를 하게 된다. 누구나 다 힘든 이 시기에 친구에게 내 힘듦을 나눌 수가 없다. 이 친구도 울거나 소리지르고 싶은 곳이 필요할테니까. 아니, 솔직해 지자면, 내가 이 친구 앞에서 운다고 한 들 이 친구가 나의 힘듦을 온전히,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받아주기란 힘들 것이란 걸 알고, 나는 친구의 고민을 아무런 트집이나 반박, 혹은 조언 따위나 어떠한 코멘트 없이 받고, 들어 주기만 하긴 힘든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나는 오지랖이 넓어 꼭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못된 bitch다).
그리고 나는 친구에게 고민을 내보이기가 어렵다. 이것이 진정한 우정관계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누구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조차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모습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솔직한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친구에게 기억되고 싶은 모습이 그런 모습은 아니니까. 뭐, 한 켠으로는 내 추악한 속내가 이 친구로부터 하여금 온전히 비밀이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 친구로서 내게 실망해 떠날 수도 있다는 일말의 불안 때문일지도. 그렇다고 친구에게 의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용에 따라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것도 있고, 딱히 조언이 아니더라도 그저 '지인' 정도에 불과한 사람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고민을 털어 놓으며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니까 조금 미화하자면, 나는 친구에게 응원받고 조언 받고 싶은 영역,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행복감을 느끼는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었을 뿐 모든 영역에서 친구의 역할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애인이라면 신기하게도 난 좀 더 무방비해진다. '남자친구 앞에서는 엉엉 울어도 돼', '남자친구 앞에서는 괜찮아.' 마치 부모를 대신하는 것 처럼 애인 앞에서는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나의 모든 행위와 본심에 대해 '괜찮아'진다. 남자친구는 마치 내게 실존하는 마리아 같은 존재였고, 그 자체로 종교다. 마리아 앞에서 나는 한없이 응석부려도 되고, 나약함과 추함, 마음의 바닥 끝에 존재하는 어떤 악함까지 드러내도 된다. 그래도 마리아는 나를 떠나지 않을 테니까. 연애는 마치 '마리아니까 괜찮다'는 이기심으로 시작한 고해성사, 그 다음에 내게 오는 위로에서 받는 구원의 연속인 셈이다. 종교를 통해 마음을 기댈 곳을 찾듯 의지하고 안정을 찾는 것. 친구에게는 감히 기대하기는 미안하기도 하고 힘든, 그러나 애인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것 또한 내게 진정한 친구가 없어서 그렇다고 이야기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물론 신도 결국 나를 용서, 포용하지 못하고 날 내쳐 낼 수 있다. 그러나 신과 애인의 차이는, 애인에게 버려졌을 때 내가 '개자식'이라고 욕할 수 있다는 거다. 연애와 사랑에 대해 내가 얼마나 로맨틱하고 이상적인 환상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진짜 모습에 도망갈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딱 그 정도로만 날 사랑했거나. 혹은 내 눈이 삐었었거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친구와 연인의 차이. 아무리 이 둘을 분리해 보려 해도 우정과 사랑이 서로 일정 부분 대체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의 영역을 온전히 채워 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좋은 친구가 차고 넘쳐도 사랑에 대한 갈증은 채워지지 않고, 아무리 애인이 옆에서 날 미친듯이 사랑해 준다고 하더라도 우정에 대한 욕망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친구의 말 처럼 연애가 공산주의라면 어떨까. 국가가 정해주는 사람을 무조건 내 배우자로 삼아야 한다면. 과연 그 상대와 사랑에 빠질 수나 있을까. 간절히 기도하면 그나마 나은 상대를 배우자가 지정될 수 있을까. 아, 그래도 배우자를 찾느라 들이는 여러가지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니 편한 것일까.
공산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정당한 보상 부재로 인해 생산성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내가 조금 더 놀던, 열심히 일 하던 어차피 받는 보상은 똑같다. 노력한 만큼 대가가 오지 않고, 사람들은 점점 프리라이더(free rider, 무임승차자)가 되어간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좋은 상대를 만나기 위해 열심히 나를 가꾸고, 나를 어필하고, 나를 최상의 사람으로 만들어 놨는데, 지정된 상대를 보니 노력한 보람이 없다. 결국 우리는 '별로 좋지 않은' 상대를 만나고, 상대에게도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 되어간다. 존재하는 연애와 사랑의 퀄리티가 낮아진다. 차라리 세상에 사랑과 모든 로맨스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 물론, 사람은 좋다, 나쁘다로 평가될 수 없는 고유한 존재다.
더이상 반박할 필요도 없이 연애가 공산주의면 안된다. 하물며 종교에도 선택의 자유가 있는데, 연애가 공산주의인 것은 말도 안된다. 내 안의 우수한 연애-백혈구들이 사망선고 받은 썸과 치열하게 싸워 물리쳐 내도록 하는 과정은 우리가 더 나은 연인을 찾고 가려내기 위한 '면역 강화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원래 백혈구가 바이러스들과 치열하게 싸울 때 열도 나도 몸이 아픈 법이다. 그래야 병이 낫고, 몸에 면역력도 생긴다. 우리 몸도 더 건강해 지기 위해 고생 아닌 고생을 하는데, 더 좋은 상대 만나느라 시간 들이고, 돈 좀 들이고 하는게 아까울리가 있을까.
자유지상주의기 때문에 이로운 것은 내가 노력한 만큼 최적의 연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력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이에 따르는 보상. 그것은 단순히 사회와 경제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연애의 영역에도 주어진 자유의 특권이다. 그러니 (힘들겠지만) 노력의 자유를, 탐색의 자유를 누리길 바란다.
연애를 갈망하는 사람1과 사람2에게 신의 가호를 빈다. 분명히 신은 당신의 인생 어떤 시점에 몇 번의 연애와 결혼을 계획했을 거다. 결혼도 '몇 번' 일 수 있다는 것 주의.
'썸-사망남'은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미치도록 연애가 하고 싶은데, 그런데 잘 안되는데, 어떻게 해야하지?"
"종교를 만드는게 어때. 애인의 가장 좋은 대체재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