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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 Jul 21. 2016

나는 대나무숲에 남친을 뒷담한다.

나를 받들어 모셔야 할 당신을 향한 고백

여러 글을 통해 성숙한 척, 어른인 척 했지만 사실은 '성숙' 근처에도 못 가는 철부지다.

일하는 남자친구를 '이해 해야지', '바쁘잖아', '어쩔 수 없지' 등등 여러 가지 말들로 서운함, 서러움, 짜증, 분노, 심지어 원망까지 삭히려 하지만 때때로, 아니 종종 추스려지지 않는 마음들이 있다. 당연하다. 나는 항상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니까.


연애를 하다 보면, 누구에게도 꺼낼 수 없는 속마음이 있다. 첫 번째로 친구들에게 말 하자니 '내 얼굴에 침 뱉는' 꼴이 되는 것 같고, 두 번째로 애인과 대화로 풀자니 구질구질 혹은 구차해 보이니까(혹은 철 없어 보일까봐). 꺼내 놓지 않은 그 속마음,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화병이 생기고 결국 이별을 부른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속마음을 꺼내 놓기란 쉽지 않다.


생각 조각집 두 번째는 그동안 온갖 '척'을 다했던 나의 구차함과 찌질함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에게도 꺼내 놓을 수 없었던 감정, 생각들. 아니, 찌질하다기 보다는 '당연히' 느끼는 감정인데 드러내자니 민망한 것들이라고 정리해 두겠다.




#01

"남자친구 있어요?"

"네"

"만난 지 얼마나 됐어요?"

"3년 반이요"

"자주 만나요? 일하면 바쁠텐데"

"어제 만났는데요. 시간 날 때마다 보려고 노력해요"

"난 '시간 날 때 마다'가 아니라 '만나기 위해' 시간 낼 수 있는데"

"저는 그런 호의 필요 없어서요."


아니, 사실은 당신을 마지막으로 본 지 8일이 지났다.


"집적 대는 남자 없어?"

"응, 없어"


아, 얼마나 모범적인 자세란 말인가. 당신은 날 받들어 모실 운명이다.


#02

"직장인과, 아니 어떤 일이든 일을 하는 사람과 연애하는 것이 외로움과 기다림의 연속이라면 더이상 연애를 하지 않을 거야."


당신을 보지 못한 지 11일 쯤 됐을 때, 친구에게 난 선언했다. 난 다 잡은 물고기인가? 어항 관리 안하나 당신? 나 점프해 튀어 나갈 수도 있다.



#03

그렇게 한 없이 원망을, 실망을, 미움을 쏟아내면 그리워진다. 그럼 또 생각이 난다. 난 이 사람을 놓을 수 있을까. 나야말로 외로워 질 것이 두려워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들 하는 말대로 이 남자 아니면 평생 좋은 남자 못 만날 것 같은 걱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다음 달에 다가올 당신의 생일을 어떻게 챙겨줘야 할 지 고민하는 날 보면서 스스로 우습단 생각이 든다.


아빠가 알면, 당신은 군대 다시 갔다. 아빤 지금도 호시탐탐 당신은 재입대 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다.


- 당신과 싸운 6월의 어느 날



#04

연락이 오지 않는 당신을 보며, '결국 자기 할 일 다 하고 나서야 내가 생각 나겠구나'하고 실망하다가도

'이젠 내게 질린 것이 아닐까, 나와 끝낼 생각을 하는 것일까'하고 겁낸다. 나야말로 이 관계를 끝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나 좀 신경 써줘'하고 관심을 받고 싶은 것일까.


아니, 이런 고상한 말 다 필요 없다. 난 그저 시뻘건 립스틱을 바르고 당신에게 "일이야, 나야?!" 하고 따지고 싶은거다.




#05

그래, 그냥 다 내 잘못이다. 당신을 도와준답시고 지하철 시간 못 챙긴 내가 잘못이고,

1시간 반 동안 지하철을 타야하는데, 당장 토악질이 날 정도로 조절 못하고 일 한 것도 내 잘못이다.

그래도 당신에게 '나 좀 챙겨주지' 하고 말 할 수 없었고, 나 좀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할 수 없었다.

피곤한 와중에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이른 아침 대전으로 가야하는 당신이 미웠고,

당신의 책임감에, 그 놈의 사업인지 뭔지에 내가 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내게 절대 먼저 '시간이 늦었으니 데려다 주겠다' 이야기 하지 않는 당신에게 실망했다.


당신의 사람들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말하며, 당신에게 투정도, 짜증도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싫었고,

속으론 '나 좀 한 번만 봐줘'라고 수 백번, 수 천번 소리 지르는데 겉으론 어른인 척, 이해하는 척 가만히 있는 내가 바보 같았다.

이 모든게 무한 반복 되면서 수도 없이 실망하고 상처 받으면서도 그놈의 사랑이 뭔지, 아니 두려움 때문인지 당신을 먼저 놓지 못하는 내가 머저리 같았다.


그래서 지금도 당신은 모른다.

지하철 안에서 눈물을 참아가며 역류하는 오바이트를 참았고, 비로소 역에 내렸을 때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핸드폰을 붙잡고 쭈그려 앉아 울다 결국 순찰하던 경찰이 내게 와 '괜찮냐'며 물었고 결국 엄마와 통화하며 늦은 새벽 택시를 탔다. 나쁜자식. 멍뭉이 같은 자식. 당신은 임마, 엎드려 100번 절하고 1000번 쯤 밥 사야한다.




#06

심심치 않게 듣는 소리가 있다. "힘든 연애를 하시네요."

이 말을 듣는 날이면 어김없이 방에서 혼자 울곤 한다. 내가 힘들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는 것 같아서. 그 자체만으로 위로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내게 그랬다.

"넌 참 많이 울어야겠다."


아니, 나는 더이상 울고 싶지 않다. 그만 좀 울려라, 이 자식아.



#0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사과 앞에선 항상 약해진다. 그 누구보다 냉정하고, 정 없다고 정평이난 난데, 왜 당신에게는 한없이 약해질까. 오랜 친구도, 흔히 말하는 '황금 인맥'도 척척 잘만 끊어내던 난데 당신은 참 질기다. 10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지만, 당신은 아마도 내게 바오밥 나무 쯤 되나보다.


이 말을 했을 때, 당신은 내게

"내가 더 사랑할게. 내가 더 아껴주고 소중하게 대할게. 항상 미안해. 그리고, 기다려줘서 안 떠나줘서 고마워." 한다.


이 말은, 마약이다. 다시 한 번, 당신은 내게 숨긴 과거가 '매우 많음'이 분명하다. 배신자.




#08

'남사친'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당신이 밉다. 제희역사 지분율 40%인 대주주들을 어떻게 겨우 16% 밖에 지분이 없는 당신 따위가 만나지 말라 할 수 있는가. 주주총회에선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꼬우면 당신도 '여사친' 만나라. 제발.

당신이 맨날 남자를 만나 듯, 나도 똑같이 남자 만나는거다.


- 남사친 만난다는 말에 삐진 당신의 5월 중 어느 날




#09

사실 나는, 당신이 모르게 당신의 핸드폰을 염탐하고 있다. 여자 이름이 나올 때 마다 심장이 쿵쿵한다. 진짜 여사친 만난다고 하면 난 그녀의 모든 SNS를 파헤 칠 의향이 아주 다분히 있다.




#10

"네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

"아침에 안마해줘야 해"

"결혼하면 종종 저녁엔 영화 보고 맥주도 마시자"

"널 닮은 아들을 낳자. 남자는 애교가 좀 많아야해"


프로포즈나 허락하고 이야기 해라.

그럼 매일 같이 C컵 같은 계란찜, 마사지방 같은 안마 다 해줄게.


- 16번째 결혼 프로포즈에 차인 날. 한 번 더 거절하면, 나는 그대로 연애 이적시장에 기쁜 마음으로 나갈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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