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책방

-시나리오쓰기_연습

by 소란


다정책방(시나리오)






S#1 프롤로그 - 17평 임대아파트, 내부, 가을 아침




막 잠에서 깬 부스스한 모습의 67세 독거노인 순희,


먹고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의 그녀.


취사한 지 13시간이 지났다는 표시가 있는 밥통을 열어 그릇에 담고,


누리끼리한 밥을 식탁 위에 놓는다.


식탁 의자에 앉은 채로 바로 옆에 있는 냉장고 문을 연 순희,


몇 개 없는 반찬통 사이에서 김치통(딱 봐도 시어 꼬부라진 총각김치가 반쯤 남은 김치통)을 꺼내고, 1.5리터짜리 생수병을 꺼낸다.


순희는 밥에 물을 부은 다음 숭늉이 된 국물을 마신다.


국물을 마시던 순희는 사레가 걸려 몇 번 헛기침을 한다.


떠오르는 타이틀.




다정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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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 (10년 전) 같은 아파트, 내부, 아침




순희는 콩나물국과 계란말이 반찬을 준비한다.


출근 준비로 바쁜 병만은 아파트 여기저기를 분주히 왔다갔다 한다.


식탁에 병만이 앉자, 순희는 자기 밥그릇에 생수를 붓고 마주 앉는다.




병만 (순희가 안쓰러운 듯이) 또 그러네. 아침부터 그렇게 탄수화물을...


순희 (남편이 밉지 않은 듯이) 또 술 먹고 들어온 주제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는다.




S#3 같은 날 아파트, 내부, 저녁




일찍 퇴근해서 들어온 병만의 손에 검은 봉지가 들려있다.




순희 뭐야?


병만 아침으로는 이거 먹자고




순희는 봉지에 있는 것들을 식탁 위에 부려놓는다.


사과 한 봉지, 양배추 반통, 견과류 믹스 한 봉지, 장 요구르트 한 줄.


순희는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미소 짓는다.




S#4 병원 중환자실, 내부, 오후




(중년의) 간호사 (다급하게 순희를 부르는 소리) 순희 쌤! 순희 쌤!




(중환자실 면회복을 입은 순희) 보호자실에서 멍한 표정으로 대기하던 순희는 직감한다.


이제 모두 끝났음을.


순희는 간호사를 따라 급하게 병실에 들어간다.


산소호흡기를 낀 병만이 가래 끓는 소리로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다.




(중년의) 의사 (조심스럽게) 마지막 인사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순희는 숨을 쉬느라 애쓰는 병만의 손을 붙잡으려고 노력한다.


몸부림 치느라 잘 잡히지 않는 병만의 손.


순희는 손을 뻗어 병만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병만은 호흡은 더 거칠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순희가 병만의 눈물을 닦아준다.




순희 (다정하게) 괜찮아. 나 여기 있어.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순희가 병만의 귀에 대고 반복해서 말한다.


병만의 호흡이 서서히 잠잠해지더니 그대로 멈춘다.


순희를 불렀던 간호사가 순희의 등을 쓸어주며 운다.


(일동 침울한 분위기)




S#5 장례식장, 내부, 저녁




장례식장에 화환이 줄을 서 있다.


대부분 병만이 근무했던 의전농협 관계자들이 보내온 것이다.


순희가 15년을 근무했고, 병만이 죽음을 맞은 태성병원에서 보낸 화환도 보인다.


순희는 아들 윤석과 단둘이 문상객을 받는다.


병만과 관계한 농협 직원 다섯 명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방에 앉는 중이다.




옆 지점 농협 조합장 (속삭이듯이) 아니, 요새 폐암은 다 고친다던데,


정년도 못 채우고 어쩐 일이야?


옆자리의 여자 (역시 속삭이며) 열어보니까 벌써 척추까지 다 전이가 돼서.




옆 테이블에 문상객들이 자리를 잡자 여자가 말을 멈춘다.


말을 걸었던 중년 여자가 조용히 탄식한다.




옆자리의 여자 (속삭이듯이) 원체 속으로 삭이시는 분이라서,


담배는 또 얼마나 피우셨다고요.


옆 농협 지점장 알지. 내가. 지난 번 정도식품 건도 병만 씨가 다 뒤집어썼다며.


(힘 빠지는 목소리) 에구. 진짜. 사람만 좋아가지구.


(순희 곁에 선 아들을 보며) 귀한 아들 얼굴을 이렇게 보네. 아예 들어온 건가?


옆자리의 여자 아닐 걸요?


벌써 십 년 다 되어 가는데요.


미국 사람 다 됐죠. 이제.




윤석과 순희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두 사람.


장례식장으로 순희의 병원 동료들이 대여섯 명 들어온다.


병만의 마지막을 지켜준 의사와 중환자실에 있던 중년의 간호사 일행이다.


그들은 병만의 사진에 대고 절을 한 다음, 순희와 윤석과 마주 절한다.


중년의 간호사가 순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한다.




간호사 형부,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예요.




말하는 간호사의 눈시울이 빨갛다.




순희 (힙겹게 받으며) 고마워.




간호사는 옆에 있는 윤석의 등을 살짝 두드려준다.


멍한 표정의 윤석이 고개를 숙인다.




S#6 다시 순희의 아파트, 내부, 오전




순희는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한다.


(기름기가 없는 식사여서) 세제 없이도 그릇은 금방 헹궈진다.


화장실에 들어간 순희는 양치를 하며 거울을 본다.


오른쪽 얼굴, 왼쪽 얼굴, 가만히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는 순희.


나이 먹은 게 새삼스럽다는 듯이 자신을 관찰한다.


순희는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거실로 나간다.




S#7 산책길, 외부, 오전




순희는 단출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밖에 나갈 채비를 한다.


순희가 시계를 본다. 아침 여덟 시, 정확히 순희는 아파트 문을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아파트 바깥으로 나가니 가을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순희는 멈춰서서 가을 하늘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듯이 큰 숨을 두 번 들이켜고 내쉰다.


순희의 표정이 밝아진다.


힘차게 걷기 시작하는 순희.


아파트 상가를 지나가고 끄트머리쯤에 이르자 남자 셋 여자 한 명이 보인다.


높은음자리표와 엔젤 피아노 학원이라는 글자가 박힌 낡은 간판이 붙어 있는 빈 상가 앞.


뭔가를 상의하는 세 사람이 있다.


순희는 사람들 쪽을 힐끔거리며 귀를 쫑긋한다.


별로 들리는 건 없다.


순희는 체념한 듯 금세 상가를 지나쳐 천변으로 내려간다.


천변을 힘차게 걷다가 막다른 길에서 방향을 바꾼다.


다시 시계를 쳐다보는 순희, 시계는 8시30분을 가리킨다.


순희는 손 그늘을 만들어 아침 해를 한번 본다.


(10월 초) 아침 해가 창창하다.


(순희가 하늘을 보는 사이) 순희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마르티즈 한 마리를 데리고 추월해간다.


강아지와 주인 둘 다 몸이 날렵하다.


(무언가가 생각나는 듯이) 순희는 서서 멀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멀뚱히 쳐다본다.




S#8 회상 - 순희의 과거 집(24평의 제법 아늑한 아파트), 내부, 저녁(밥상머리)




순희, 병만, 윤석, 세 사람이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다.




윤석 (큰 결심을 한 듯) 우리도 강아지 키우자.




얘기를 들은 순희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병만도 잠시 멈칫했다가 밥을 다시 먹는다.




순희 (단호하게) 안 돼.


윤석 (꼬장꼬장하게) 왜 안 돼? 채현이도 키우고, 민상이도 키우는데,


우리는 왜 안 돼?


순희 (달래듯) 우리는 아파트잖아.


윤석 (눈시울이 붉어지며) 걔네도 다 아파트 살아.




부부는 잠시 서로를 쳐다본다.


병만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한다.




병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엄마, 아빠가 바쁘잖아. 개는 손이 많이 가서 안 돼.


윤석 (조르듯이) 내가 해주면 되잖아요.


순희 아무튼 안 돼. 엄마는 감당 못 해.


나중에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면 모를까.




윤석은 그새 숟가락을 내려놓고 눈물을 훔친다.




병만 (부드럽게 타이른다) 어? 이 녀석이. 뚝 그쳐.


그치고 밥 먹어. 밥 남기면 벌받아.




윤석이 다시 숟가락을 들고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더니 그 상태로 눈물을 흘린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 계속 팔뚝 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는 윤석.




S#9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 외부, 오전




순희가 다시 아파트 상가에 접어든다.


오전에 본 한 중년 여자가 엔젤 피아노 안으로 들어간다.


파마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원피스를 입은 키가 작은 여성이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 귀여운 이미지였다.


순희는 문득 가게의 정체가 궁금해져 멈추고 여자의 뒷모습에 시선을 둔다.


뭔가를 묻고 싶은 듯 움찔거리는 순희,


곧 포기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마침 안에 있던 여자는 가게 앞을 지나가는 순희를 본다.


(서로의 시선이 시간차를 두고 교차한다)


무채색의 가벼운 옷을 입은 노인,


여자는 노인의 걸음걸이가 가볍다고 생각한다.




S#10 순희의 집, 내부, 오전




샤워를 한 순희가 욕실에서 나온다.


어깨에 수건을 받치고 젖은 머리를 한 채 테팔 커피기기로 커피 한 잔을 내리는 순희,


커피잔을 든 채로 순희는 창가에 선다.


선 채로 창가를 보는 순희의 시선에 따라 창밖 풍경이 보인다.


(아파트 5층에서 조망하는 풍경이 들어오고)


제법 큰 벚나무들이 아파트 옆으로 무성하다.


잎이 갈변해서 하나둘 거리에 흩날리는 (운치 있는)풍경,


순희가 풍경을 즐기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전화벨이 울린다.


순희가 한숨을 내쉰다.


식탁 위 전화기에 ‘사랑하는 아들’이 뜬다.


순희는 잠시 기다렸다가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고 전화기 쪽으로 간다.




윤석 오랜만이야, 엄마.


순희 그래, 어떻게 지냈니?


윤석 잘 지냈지.


(씩씩하게) 엄마, 나 잘하면 올 겨울엔 한국에 갈 수 있을 거 같아.


순희 (최대한 절제하며) 그러니?




순희의 얼굴에 슬며시 기쁨이 번진다.




S#11 순희의 회상 / 인서트




순희의 머리 속에 영상이 펼쳐진다.


어린 윤석이 화첩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


아이가 그린 그림이 만화 슬라이드처럼 지나가고,


순희가 그림을 보며 박수치는 모습,


아이를 끌어안고 뽀뽀하는 모습,


윤석이 자랑스럽게 미대에 입학하는 장면,


군에 입대하는 장면,


제대 후 남편 병만과 크게 싸우는 장면(아이가 미대를 자퇴한다고 하여),


공항에서 윤석과 헤어지는 장면,


미국행 비행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장면,


위의 장면들이 빨리, 꿈처럼 지나간다.


S#12 다시 아파트 안, 내부, 오전




윤석 엄마, 엄마!




순희가 윤석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순희 으응


윤석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어?


여기 정리하고 있는데, 이번에 차도 팔고 가구도 내놨거든,


그래서 곧 돈이 들어올 거 같아.


근데 집세가 좀 밀려서 그것만 좀 처리하고,


돈 들어오는 대로 바로 돌려드릴게.




순희의 안색이 변한다.




순희 (살짝 달뜬 목소리로) 거기를 정리하고 아예 들어온다는 얘기야?


윤석 상황 봐야겠지만, 그럴 거 같아.


순희 (기대하며) 그래서 얼마가 필요한대?


윤석 (힘을 들여) 한 육백 정도?




잠시 뜸을 들이는 순희,




윤석 엄마! 여보세요?


순희 으응, 그래 한번 보자.


윤석 엄마, 진짜 마지막이야.


(당당하게) 여기 처분하면 그동안의 것까지 한꺼번에 드릴게.




순희가 말을 돌린다.




순희 (걱정하며) 윤석아.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윤석 (무언가에 쫓기듯) 엄마! 이번 주까지 가능해?


순희 (체념한 듯) 그래, 이따 은행에 가서 해볼게.




전화를 끊고 순희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


창가에 비친 순희의 얼굴 표정이 참담하다.


점심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걸 느끼며 순희는 오만상을 찡그린다.




S#13 은행에 가는 길, 내부/외부, 오전




순희는 다시 아침에 입었던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식탁 위 작은 서랍에서 통장과 도장과 신분증을 챙겨 가방에 넣는 순희.


순희는 캡모자를 눌러쓴다.


캡모자 바깥으로 지푸라기 같은 머리칼이 새어 나온다.


아파트 바깥으로 나온 순희의 발걸음이 무겁다.


상가를 벗어날 찰라에 아침에 봤던 상가 앞으로 책장이 주욱 늘어서있다.


아침에 보았던 긴 머리의 여자는 택배 기사와 한참 얘기 중이다.


순희는 남자와 여자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친다.


여자는 순희의 뒷모습을 또 한 번 본다.




S#14 은행, 내부, 점심 무렵




보안요원 무슨 업무 보시게요?




순희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한다.


순희가 익숙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송금 담당 직원이 전화 통화를 하며 순희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끄떡한다.


순희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맞받는다.


순희는 대기석에 앉는다.


직원이 전화를 끝낼 때까지 통장만 쳐다보고 있는 순희.


순희가 통장 첫장을 넘긴다.


병만이 죽으면서 남긴 사망보험금 3억 원의 입금 내역이 보이고,


맨 마지막 장으로 넘기자 윤석에게 500만 원을 송금했던 5개월 전의 기록이 보인다.


같은 페이지에 8개월 전에 1,300만 원을 붙인 출금 이력도 있다.


잔액은 1억 3천만 원.




직원 (웃으며) 어머니, 이번에는 얼마요?


순희 (주눅이 들어) 육백을…….




직원에게 통장을 내미는 순희.




직원 (친근하게 타박하듯) 이렇게 계속 퍼주니까 아들이 정신 못 차리는 거예요.


순희 (변명처럼 늘어놓으며) 아니,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에요. 곧 들어온대요.


한국에. 여기로 온다구요.


직원 (마치 순희를 놀리듯이 말꼬리를 늘이며) 아아, 네에.




순희는 얼굴이 새빨개진다.


순희의 몸이 수치심과 분노로 살짝 떨린다.


창구 앞 칸막이에 “지금 앞의 직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라고 붙은 스티커,


순희는 그 글자를 노려보고 있다.


직원도 순희의 기운이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그 뒤로는 조용하게 일처리를 한다.




S#15 은행에서 돌아오는 길, 외부, 점심




순희가 씩씩대며 다시 천변을 걷는다.


한낮의 햇볕이 뜨겁다.


상가 입구에 다다랐을 때 상가 안으로 그새 책장이 다 들어갔다.


휑하던 시멘트 박스가 나무 책장만으로 온기를 품었다.


순희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마술처럼 변한 그곳에서 눈을 못 떼고 있다.


상가 문이 열리고 여자가 나와 인사한다.




여자 안녕하세요?


순희 아! 네, 안녕하세요?


여자 (애교 섞인 저음의 목소리) 저, 여기에 책방 열어요. 문 열면 놀러 오세요.




둥근 뿔테 안경 사이로, 여자의 작지만 반짝이는 두 눈이 고요했다.




순희 (의아해하며) 책방이요?


여자 요새는 이렇게 작은 책방들을 열어요.


여기서 책도 팔고 커피도 팔 거예요. 독서모임 같은 것도 하고요.


순희 여기서 책을 살 수 있다는 말인가요?


여자 네, 선생님 책 좋아하세요?


순희 아……. 예. 그래요. 준비 잘하세요.




순희는 얼결에 대답하고 걸음을 돌린다.




여자 (순희의 뒷모습에 대고) 안녕히 가세요. (공기 반 소리 반인 목소리)




S#16 순희의 아파트, 외부/내부, 점심




순희는 연민이 가득한 눈길로 낡은 아파트 단지를 조망하며 걷는다.


그러고는 체념한 듯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에 다닥다닥 지저분하게 붙은 광고지들이 보이고,


뻔대없는 글씨체로 ‘506호’가 박혀있는 순희의 집 앞.


순희는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자마자 안방으로 들어간다.


안방에는 순희의 작은 3단 책꽂이가 있고, 거기에 질서정연하게 책이 꽂혀있다.


순희는 그 앞에 쭈그려 앉는다.


책등을 검버섯이 여기저기 올라온 주름진 손으로 가만히 훑는 순희.


가만히 훑다가 몇몇 책에서는 멈칫거리기도 한다.


급기야 순희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꺼내 펼친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방법은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욕망을 실현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94쪽) 라는 곳에 그어 놓은 밑줄이 나오고,


순희는 다시 회상한다.




S#17 20여년 전 아파트, 내부, 밤




작은 숨소리.


중년의 순희와 병만이 부부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


한참을 끙끙대며 섹스에 열중하던 병만이 옆으로 고꾸라진다.


잠시 숨을 고른 두 사람 나란히 눕는다.




병만 (허탈하게) 줄 게 이거 밖에 없었는데, 어쩌냐?


순희 (작게 웃으며) 해방이네. 이제.


병만 미안해.


순희 다 그러고 산다. 그냥 그런 때가 온 거지. 어떻게 보면 징글징글하다.


우리는 대체 몇 번이나 했을까?


병만 365곱하기 30?


순희 으이그(순희 웃으며 병만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는 시늉)




병만과 순희는 맨몸으로 서로를 안는다.


나란히 서로의 등을 토닥거리는 부부.




S#16 순희의 방, 내부, 점심




순희는 다시 책 등을 훑다가 권정생 <강아지 똥> 을 꺼내든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순희.




S#18. 병원, 내부, 저녁




윤석의 일곱 살 생일날이다.


순희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는 시간,


간호사 윤(남편의 임종을 지켜주었던 동료 간호사의 젊은 시절)이 병동으로 들어온다.




순희 (반갑게) 빨리 왔네?




윤이 웃으며 로봇과 우주선이 빼곡히 그려져 있는 포장지에 담긴 선물을 내민다.




윤 (능청스럽게) 우리 윤석이 생일인데 제가 모른 척 할 수가 없죠?


윤석이 낳느라 고생했어요.


얼른 들어가요.




윤은 그 말을 하고 간호사실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다.


순희는 얼결에 받은 선물을 소중히 쳐다본다.




순희 (탈의실 쪽에 대고 큰소리로) 고마워.


윤 (탈의실에서 대답하는 윤) 얼른 가요. 쌤. 윤석이 기다리겠다.




S#19 25평 순희의 아파트, 내부, 밤




윤석의 생일 날, 밤


집에 돌아온 순희는 미역국과 케이크로 생일상을 차린다.


윤석과 단둘이 마주앉은 저녁 식사자리.




윤석 (시무룩하게) 아빠는?


순희 오늘 일이 좀 늦게 끝난다고 하셨어.


윤석 (잔뜩 심통이 나서) 어제도 늦었잖아.


순희 (말을 돌리며) 어? 촛농 다 녹네. 우리 빨리 소원 빌고 선물 풀어볼까?




윤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꼭 감는 윤석, 속으로 소원을 빈다.


윤석은 귀여운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후하고 분다.


순희가 윤에게 받은 선물을 내민다.


윤석이 선물 포장지를 뜯는다.




윤석 (기분이 갑자기 좋아져서) 우아! 강아지다.




금세 환해진 윤석을 순희는 꼭 껴안는다.




순희 읽어볼까?




순희는 뒤에서 윤석을 감싸안고 책을 읽어준다.


계속 또 읽어달라고 조르는 윤석에게 순희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책을 읽어준다.


‘강아지 똥’을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든 윤석,


윤석의 이마에 순희는 가만히 입을 맞춘다.




S#16 순희의 방, 내부, 점심




다시 순희의 방, 신경림 <농무>를 꺼내드는 순희.


다시 과거로 빠져든다.




S#20 고등학교, 내부, 오후




k여자상업고등학교 2학년인 순희, 어느 가을,


순희가 짝사랑하던 국어선생님의 수업시간이다.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눈빛을 빛내며 수업에 열중하고 있는 순희.




선생님 때로 사람은 어떤 문장을 가슴에 품고 살기도 합니다.


글에는 그런 힘이 있어요.


오늘은 이 시를 한 번 필사하고 느낌을 나눠봅시다.




선생님은 칠판에 <갈대> 시 전문을 옮겨 쓴다.


그는 겉모습처럼 글씨체도 근사하다.


순희와 반 아이들도 선생님이 쓰는 시를 공책에 옮긴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순희는 담임이 쓴 구절 중에 그것을 되풀이해 읽는 시늉을 한다.


입모양만 움찔거리며 외우듯이.




S#21 하굣길, 외부, 늦은 오후




하교 후 혼자 집에 가는 길.


들판 한가운데 난 도로 위를 걷고 있는 순희.


순희는 그 문장을 외워 말한다.




순희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그러다가 순희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본다.


파랗고 맑은 하늘에 구름 몇 점이 파스텔로 터치한 듯 흩어져있다.


사이로 새 한 마리가 쓸쓸히 날아간다.


순희는 새가 안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S#21 산책길, 외부, 아침




순희가 집을 나선다.


상가를 걸어 책방이 들어온다는 상가를 빨리 지나간다.


여자는 상가 내부를 정리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순희를 본다.


일부러 상가 안쪽을 쳐다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순희의 발걸음이 부자연스럽다.


그러다가 순희는 강렬한 어떤 충동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는데,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희,


순희는 놀라며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빨리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여자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S#22 산책길, 외부, 아침




며칠 후, 산책에서 돌아오는 순희,


인도에 놓인 책방 간판을 본다.


‘다정책방’이라는 아기자기한 글씨가 가로로 나무에 새겨져 있다.


왠지 주인장의 모습과 닮은 글자다.


순희는 걸으면서 혼잣말로 작게 ‘다정, 다정, 다정’이라고 말해본다.


발음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순해지며 편안해 진다.


순희는 가만히 미소 짓는다.


집으로 향하던 순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아파트 상가에 있는 마트로 발길을 돌린다.


왠지 그날은 자신에게 좀 다정해지고 싶다.


순희는 자연스럽게 빵코너로 걸어가 칼을 대지 않은 식빵을 고른다.


순희는 그날 점심으로 살짝 구운 식빵에 사과잼을 발라 오래오래 씹을 것이다.


예쁜 종이봉투에 담긴 선물같은 식빵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는 순희,


집에 들어가자마자 순희는 식탁에 식빵을 올려둔다.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순희는 식빵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서 꺼내고,


냉장고에서 삼분의 일쯤 먹다 남은 사과잼을 꺼낸다.


필립스 커피머신기에 원두 가루도 넣고 투박한 머그 그릇에 커피를 내리는 순희.


그것들을 모두 식탁에 부리고 마침내 자리에 앉아 마치 명상을 하듯 그것들을 쳐다본다.


순희의 얼굴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다.




S#23 순희의 집, 내부, 아침




창밖이 점점 밝아진다.


개운하게 눈을 뜨는 순희.


순희는 팔다리를 쭉 뻗고 스트레칭을 한다.


그 상태로 발끝치기 동작을 스무개를 하는 순희.


누운 채로 생각이 많아 보인다.


산책 나갈 준비를 마친 순희,


설레는 표정의 순희는 시계를 쳐다본다.


시곗바늘이 보통 때보다 20분 빠르게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울을 보며 다시 한 번 외출준비를 체크하는 순희,


입었던 바람막이를 벗고 옷장으로 간다.


옷장 속에는 남자의 옷으로 보이는 니트들이 몇벌 보인다.


그 중에서 정장조끼같은 것을 하나 꺼내 애틋하게 쳐다본다.


순희는 조끼의 냄새를 맡는다.


순희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그것을 입는다.


그러고는 다시 바깥에 바람막이를 걸치는 순희.




S#24 산책길, 외부, 아침




이른 아침인데도 책방 상가 앞에 사람들이 몇 보인다.


책방 앞 ‘다정책방 그랜드 오픈 11시’라고 붙어있는 종이가 보이고,


순희는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공원 쪽으로 직진한다.


공원까지 한 바퀴 돌고 살짝 상기되어 돌아오는 길,


속속들이 도착한 화분이 몇 개 보인다.


슬쩍 고개를 돌려 안을 들여다보니 여자가 무언가를 포장하고 있다.


(개업 선물로 작은 시집을 포장하고 있는 여자)


여자 맞은 편에 한 남자도 일을 돕고 있다.


둥글둥글한 인상이 왠지 그녀와 닮았다.


멈칫거리다가 체념한 듯 발길을 돌리는 순희.




S#25. 순희의 집, 내부, 오전




순희는 집에 돌아와 오래 씻는다.


살짝 화장도 한다.


가진 옷 중에서 가장 단정해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순희가 시계를 본다(10시 즈음을 가리키는 시계).


순희는 머뭇거리다가 커피 머신기 앞에 선다.


천천히 커피를 내려서 창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마신다.


순희가 보는 바깥 풍경으로 가을이 완연하다.


단풍이 든 멋진 풍경, 하늘도 새파랗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윤석이었다.


순희가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고 전화를 받는다.




순희 (담담한 말투) 그래.


윤석 (뭔가에 쫓기듯) 엄마! 진짜 미안한데 400만 더 해줄 수 있어?


그럼 딱 천만 원인데.




순희의 표정이 굳는다.




순희 (힘없이) 윤석아.


윤석 엄마, 진짜 마지막이야. 한 달 내로 제가 정리할게요.


거의 다 정리했어요.


순희 (확답을 받겠다는 투로) 한 달 내로 정리하고 정말 들어온다는 거니?


윤석 그럴 거 같아.


순희 그럴 거 같다니, 정확하게 말해야지?


윤석 한 달까지 안 걸릴 수도 있어요. 엄마.


(애타는 목소리) 진짜 나도 더는 못 버티겠어. 빨리 정리할게요.


순희 (소용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 정리하는데 왜 돈이 들어가?


윤석 엄마, 그동안 내가 빌린 돈이 있었어.


근데 여기 정리되면 문제없어. 돈 받기로 한데가 있어.


시간이 좀 걸려서 그래.


순희 400이면 돼?


윤석 (반색하며) 더 여유 있어?




순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뜸을 들인다.




순희 (최대한 또박또박) 아니, 400이야 그럼, 딱 400.


더는 안 돼, 윤석아, 엄마도 힘들어.


윤석 알았어요. 엄마, 고마워. 진짜 고마워.




전화를 끊고 커피잔을 치우는 순희의 손이 떨린다.


순희는 힘겹게 화장실에 들어간다.


순희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한껏 꾸민 자기 모습을 본다.


순희는 휴지를 잘라 입술의 루즈를 지운다.


그리고 다시 벽에 걸린 캡모자를 찾아 머리에 눌러쓴다.




S#26 은행에 가는 길, 외부, 오전




책방 앞이 소란하다.


그새 화분이 입구에 가득하다.


노란 불빛이 가득한 공간에 사람이 꽉 차 있다.


주인 내외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느라 바쁘다.


몇 개 안 되는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루떡을 먹고 있다.


순희는 모자를 좀 더 깊이 눌러쓰고 책방 앞을 지나친다.


복잡한 책방 안에서 쓸쓸히 순희가 지나가는 길 조망.




S#27 순희의 집, 내부, 아침~밤




텔레비젼이 켜있는 순희의 집,


순희는 언제나처럼 밥에 물을 말아 먹고 있다.


밥 먹은 걸 싱크대에 대충 놓는 순희, 싱크대가 지저분하다.


순희는 곧장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텔레비전을 본다.


무표정의 순희, 곧장 졸음이 몰려오는지 하품을 하고, 졸기 시작한다.


해가 중천에 걸렸다가 서쪽으로 사라진다.


순희는 어느새 소파에 드러눕는다.


바깥이 곧 어둑어둑하다.


잠에서 깬 순희는 저녁 먹는 것도 잊은 채 방으로 들어간다.


조용히 일인용 침대에 눕는 순희.




S#28 순희의 집, 내부, 오후




순희는 소파에 누워 자고 있다.


초췌해 보이는 순희,


켜 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크다.


텔레비전에서는 1986년, 김추자 스페셜 영상이 재방송되고 있다.


순희는 김추자가 <님은 먼 곳에>를 처연하게 부르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뜬다.


자세를 조금 바꿔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는 순희,


노래의 분위기와 달리 삼십 대의 김추자는 탱글탱글 어여쁘다. 모습도 목소리도.


사회를 보는 두 사람도 생판 젊은 모습이다.


순희는 한동안 그 상태로 누워서 쇼를 본다.


그러다가 노래 <무인도> 전주 부분에서는 결국 일어나 앉는다.




S#29 노래방, 내부, 밤(회식 자리)




사람들 (일동 합창) 정순희! 정순희!




텔레비전 아나운서처럼 촌스러운 차림의 사람들,


병원 간호사 8명과 의사 2명이 모인 회식 자리,


이제 순희의 차례다.


순희는 안 한다고 버티다가, 몇명의 간호사에게 연행되듯 무대에 오른다.




순희 (쥐구멍에 들어가는 소리로) 그럼, 무인도를.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 소리,


마이크를 잡고 조용히 노래를 시작하던 순희가 뒤로 갈수록 힘을 받아 노래한다.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후렴구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되며 순희는 멋들어지게 절창 한다.




S#30 순희의 집, 내부, 오후




순희는 조용히 노래를 따라 한다.




순희 (허밍 하듯) 솟아라 태양아, 어둠을 헤치고,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라,


빛나라 별들아, 캄캄한 밤에도, 영원한 침묵을 비춰다오.




순희는 목소리를 높인다.




순희 (마지막 구절을 큰 소리로 따라 부른다) 불어라 바람아, 드높아라 파도여!


(마치 무대에 선 듯 양팔을 벌리고) 파도여!




순희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솟는다.


순희가 2절을 부르는 사이 휴대전화가 울린다.


순희는 그것도 모르고 울면서, 웃으면서 노래를 완창한다.


부재중 전화가 찍힌다.(휴대폰에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글자가 찍히고).


이어서 나오는 김추자의 ‘그런거라네’ 노래.


순희는 음악에 맞춰 노래 부르며 덩실 덩실 춤을 추고,


마치 앞에 누가 있기라도 한 듯 뺑그르르 돌기도 하며 노래를 부른다.




S#31 순희의 집, 내부, 아침




순희는 눈을 뜨고 멀뚱멀뚱 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순희는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신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이부자리를 깨끗이 정리하는 순희,


부엌으로 간 순희는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 안에는 계란 5개, 먹다 남은 마른 미역 한 봉지, 총각김치 한통이 있고,


연달아 연 찬장 안에는 조미김 한 박스, 참치캔 2개가 있다.


순희는 일일이 그것들을 확인한다.


순희는 팔을 걷어 부치고 손을 씻는다.


요리를 시작하는 순희,


흐르는 물에 쌀을 세 번 씻어 전기밥솥에 꽂고,


조미김을 살짝 얹어 계란말이를 하고,


기름기를 뺀 참치 미역국을 끓이고,


평소에 반찬통 채로 먹던 총각김치도 그릇에 보기 좋게 담는다.


순희는 허리를 펴고 정자세로 앉아 갓 지은 밥과 반찬들을 천천히 먹는다.




S#32 순희의 집, 내부, 오전




순희는 제법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커피를 내리고 다시 창가에 앉는 순희, 시계를 확인한다.


오전 10시, 순희는 윤석에게 전화를 건다.




순희 안 잤니?


윤석 아직, 엄마 왜?


순희 (밝게) 왜 이긴 이 녀석아, 보고싶어서 했지.


윤석 (웃는 목소리) 엄마도 참.




웃으며 한참 통화하는 순희의 모습이 창밖에서 조망된다.




S#33 에필로그, 책방가는 길, 외부, 오전




전날 본 쇼의 마지막 곡, 김추자의 “그런거라네”노래가 깔리고,


순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왠지 젊어진 듯한 순희, 당당한 표정)


식빵을 샀던 마트를 지나고, 미용실을 지나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고, 치킨집을 지나고, 세탁소를 지나고, 부동산을 지나고, 드디어 ‘다정책방’ 앞.


순희는 심호흡을 한번 한다.


순희가 문을 열자 ‘딸랑’ 소리가 경쾌하다.




여자 (다정한 목소리) 어서 오세요.


순희 (밝게) 안녕하세요?




마주 보는 두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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