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는 깊은 역사와 의의를 지닌 공연장 및 공연단이 많이 있는데 그중 Royal Opera House(로열오페라하우스)와 Royal Ballet(로열발레단)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날은 바로 그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로열 발레단의 Onegin(오네긴) 공연을 본 날이다. 런던에서의 첫 발레 관람이자 나의 오네긴 첫 관람이라 무척 설렜다. 오네긴을 비롯하여 백조의 호수, 지젤, 호두까기 인형 등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모음곡들을 매우 좋아하지만 돌이켜보니 그중 유난히 오네긴은 그 인기에 비해 한국에서는 별로 상연된 바가 없는 것 같다. 당장 서울 예술의전당의 지난 12년간의 공연 일정만 보아도 오네긴은 고작 4회의 공연에 그친다. 그중에서도 국립발레단이 오네긴을 예술의전당 무대 위에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문득 이유가 궁금하다.
아무튼 나의 첫 오네긴 관람을 런던의 유서 깊은 공연장에서 보게 되다니! 더욱 뜻깊은 시간이 될 것만 같다.
발레 오네긴은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의 소설 <오네긴>을 바탕으로 하여 차이코프스키의 작곡을 통해 탄생된 작품으로, 오네긴과 타티아나를 주축으로 젊은이들의 사랑, 외로움, 후회 등 다층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복잡한 감정선이 농후하게 녹아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John Cranko(존 크랭코)의 격정적인 안무가 만나, 발레 오네긴은 관객으로 하여금 한시도 지루할 틈 없이 넘실넘실 일렁이는 드라마를 느끼게 해 준다. 이에 더불어, 로열발레단의 발레 오네긴 공연은 무용수들의 힘이 느껴지는 절도 있는 몸짓과 격동적인 춤선으로 이뤄진 수준 높은 퍼포먼스,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잘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아름다운 의상, 과하지 않은 클래식한 무대 디자인, 공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몰입을 돕는 유려한 오케스트라 연주 등으로 정말이지 만족스러운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더 높은 가격대의 1층 중앙부 객석에서 관람했다면 훨씬 더 감동적이었을 것 같지만 이 자리에서도 이 정도의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하다니! 이들의 양질의 발레 공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미션 때 내 옆자리의 관객과 공연에 대한 감동을 함께 공유하였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과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나누고 있는 순간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녀와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아쉽게도 뒤풀이 성사는 되지 못했다.
낮엔 비가 내리더니 밤이 되자 맑고 까만 밤하늘이 펼쳐지고 그 안에 총총 박힌 수많은 별들이 귀갓길을 인도해 주었다. 아름다운 공연을 보고 난 후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의 모든 풍경들은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