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 미술관에서 8, 9월간 작가 유현미의 개인전이 있었다. 겨우 두 달만 진행하는 것이 몹시 아쉬울 만큼 훌륭하고 인상적인 전시였는데, 내가 방문했던 때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기까지 하여서 작품에 몰입하듯 즐기기에 아주 좋았다. (작품마다 모조리 사진을 찍는 어떤 분이 끊임없이 우렁차게 내던 찰칵찰칵 셔터음만 빼면 말이다.)
<코스모스> 연작 전시층에 게시된 안내문에 의하면 작가는 설치, 회화, 사진이 혼합된 다소 독특한 작업방식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작품은 현실적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비현실적이어서 작품을 보는 내내 나로 하여금 현실과 상상의 경계, 실재와 허구의 경계에 대해서 고민해 보도록 만들었다. 칸트, 퐁티 등 여러 철학자들도 이야기한 바 있듯,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관념과 주관이 투영된 해석을 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고, 내가 믿는 것이 객관적인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이렇듯 작가 유현미의 작품들은 철학적인 사유를 유도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작품 그 자체로 예쁘기도 하여, 전시를 심오하게 관람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잃어버린 14분>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영상물인데,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닳고 난 후 '아...' 하고 절로 탄성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어진 <십장생> 연작 또한 앞선 <코스모스> 연작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의 성찰을 자아냈다. 전통문화에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을 지극히 현대적이고도 인조적인 오브제를 통해 구현한 작품들을 보면서 과연 그 십장생이란 것들이 이와 같은 형태 속에서 아직도 십장생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나아가 작가가 이 연작을 통해 현대 사회의 소비문화에 대해서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이어지는 연작 역시 매우 흥미롭다. 특히, 언뜻 보기에는 둘 사이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브제 둘셋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내고 있는 점이 감상하는 나로 하여금 더욱 호기심을 자아냈다. 작가는 왜 이 제목에 이 사물들을 함께 배치하였을까, 작가에게 있어 이 사물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존재일까 하는 문제 등을 (비록 이러한 것들은 결국엔 하는 수 없이 작가의 것이 아닌 '내 경험'을 토대로 추측하는 수밖에 없지만) 고민해 보는 점이 재미있었다.
벽에는 귀 모양을 한 모형이 마치 카멜레온처럼 벽과 같은 색을 한 채 붙어있고 그 아래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는 그림이 <듣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경우와 같이, 오브제들 사이의 관련성 혹은 작가의 경험과의 관련성을 추측해 보는 재미를 느낄 수가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현상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로 일차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작가는 작품을 보는 우리에게 의자 위에 뭐가 있는지 자꾸 보려고만 하지 말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라고, 대상을 한 감각 혹은 한 방향에서만 받아들이지 말고 여러 방향에서 느끼고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 추측해 본다. 이 연작에 있는 다른 작품들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오브제 간의 관계 및 작가의 메시지를 추측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가장 마지막으로 감상한 <그림이 된 남자> 섹션은 이전 작품들과 달리 다소 충격적이기도 했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페르소나, 즉 대외적인 이미지 뒤의 개개인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도록 하기도 했다. 남자가 그림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영상 작품과, 그림이 되어버린 남자의 사진 작품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 둘을 함께 보았을 때 작품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남자가 그림이 되어버리는 과정은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며, 완벽한 하나의 그림처럼 되어버린 이 모든 것들 사이에서 두 눈만이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고 남아 관람자를 응시한다.
작품 하나하나 그 앞에서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전시였어서 무척 재미있었다. 어쨌든 이 모든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지대한 관심을 두었던 개념은 "경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경계가 허물어지기도 하고, 기존 형태에서 벗어나 새롭게 재생산되기도 하며, 경계를 뒤섞기도 하는 듯한 그녀의 작품을 보니, 우리의 삶도 이토록 흔들리는 경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여정이려니 싶다.
전시를 모두 본 뒤 밖으로 나서려는데, 바깥으로부터 경계를 넘어 들어온 햇살이 미술관 안쪽에 쏟아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야말로 경계를 넘어 쏟아져내린 햇살이 작품에 섞여 또 다른 하나의 작품이 되고 있는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