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잊지 말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 마크브래드포드展

by Daria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신의 설치미술가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의 'Keep Walking' 전시를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평소 'Keep walking'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현존하는 미술계의 거장이 과연 이 문구를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냈을지 굉장히 기대됐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처음으로 <떠오르다>라는 대규모 설치미술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얼핏 보면 작품인지 모르고 지나갈지도 모를 이 작품은, 길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지, 신문지, 포스터 등을 이용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풍요롭다 못해 넘치는 세상이다. 풍요와 화려함 뒤에 쌓여가는 부산물, 폐기물, 한때는 쓸모 있는 물건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어 버려진 물건들, 어찌 보면 한때는 주류에 속했거나 혹은 활기가 넘쳤으나 이제는 비주류 집단 속에서 소외된 채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상징하는 것만 같은, 발아래에서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뭉개어지는 이것들을 느끼며 잠시나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작품을 느끼는 동안 문득 영화 <A.I.>가 떠올랐다.




그다음 공간에 들어서니 차가운 바닥에 웬 흰 남자가 누워 있다. 축 늘어져있는 이 남자의 모습은 무엇을 형상화하고자 한 결과물일까.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할 때는 대개 관람자 개인의 경험이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 전시를 관람할 당시의 나는(물론 지금도 여전히...) 과도한 업무량에 매우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 누워있는 남성을 보며 자유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전시장 한가운데에 그야말로 大자로 뻗어있을 수 있는 자유로움과 쿨함이라니! 전시 전체를 모두 보고 나니 작가의 작품 성향상 왠지 '자유'를 표현하고자 한 건 아닐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긴 했으나 어쨌든 처음 이 작품을 마주했을 때의 나의 느낌은 그러했다.




파마 종이, 일명 end papers를 이용하여 만든 대형 크기의 이 연작들은 작가 자신과 어머니가 함께 운영하던 미용실에서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한다. 작가의 미국 사회 속 흑인으로서의 정체성, 미용실을 운영하는 가정의 정체성을 추상적인 방식으로 짙게 담아내고 있는 이 작품은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기를 번갈아가며 느끼는 것을 추천한다. 그러한 반복의 과정을 통해, 이 작품으로 대변되는 거대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다음 공간의 <기차 시간표> 연작은 이 전시 중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다. 커다란 판 위를 가득 메운 수많은 시간표들은 삶의 터전을 떠나야만 하는, 불안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주민들의 외로움, 서러움, 고단함을 응축하여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보자마자 울컥했다. 이 연작 앞에서 차마 발걸음을 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함께 간 친구가 몰래 찍어 준 내 사진도 슬쩍...



<기차 시간표> 연작과 같은 공간에 놓여있는 이 작품 또한 무척 좋았다. 바로 아래에도 사진으로 첨부해 둔 작품 안내문에 의하면, 이 작품은

질감과 크기가 서로 다른 행성들을 통해 불균형, 고립, 생태 위기가 심화되는 오늘날 지구의 현실을 반영하며, 우리가 같은 행성에 살아도 결코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

이라 한다. 그냥 둥둥 떠 있는 여러 개의 지구 형상 구체를 마주했을 때는 특별한 느낌이 없었는데, 바닥에 놓인 작품 안내문을 읽고 나니 굉장히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이 세상은 거시적으로든 미시적으로든 불균형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이어지는 마지막 연작 <폭풍이 밀려온다>를 보면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품 철학과 이번 전시 컨셉이 뚜렷하게 보인다. 작가는 미국에서 있었던 대규모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고를 재조명하며 소외 집단, 소수자들의 불평등한 현실을 작품으로써 이야기한다.


나는 이번 전시 내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 속 소수자들의 삶, 그리고 세상에 산재하는 불평등을 말하고자 하는 마크 브래드포드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기억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무너지지 말라며 격려한다. 다시 첫 작품으로 돌아와서, 그가 현대 도시로부터 떨어져 나온 부산물들을 모으고 엮어 길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Keep Walking"이라고 한 이유를 드디어 깨닫는다.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물.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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