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교향악단이 지휘자 Eliahu Inbal(엘리아후 인발)과 성악가 Grigory Shkarupa(그리고리 슈카루파)를 모셔와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섬'과 쇼스타코비치 '바비야르'를 무대에 올렸다. Inbal 선생님을 객원지휘자로 초청한 것도 신기한데 선곡도 제법 범상치 않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공연 일자였던 2월 28일에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는 사실이다. 베이스 Shkarupa는 러시아 출신, 지휘자 Inbal은 이스라엘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날의 공연은 우연의 일치가 무척 기묘하게 와닿는 공연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공연의 본질인 음악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첫곡인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섬' (Rachmaninoff | The Isle of the Dead, Op. 29)은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곡이기 때문에 국내 공연장에서 이 곡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설렜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작곡하게 된 동기에 대해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이 그린 <죽음의 섬>의 흑백 복사본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이를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서술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이 곡을 들을 때 그 그림을 머릿속에 펼쳐놓고 감상하면 곡이 한층 더 풍부하고 깊게 다가온다. 이날 KBS교향악단의 연주가 비록 즐겨 듣는 음반의 연주만큼은 아닐지라도 실연으로 감상하는 '죽음의 섬'은 퍽 감동적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출근하여 수업을 한 후 관람한 공연이어서인지 몹시 피곤하여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였으나 1부 죽음의 섬 연주를 들을 때만큼은 등이 빳빳해지고 가슴 안에 울컥 차오르는 감동으로 피곤함과 잡념 등 속세의 모든 것을 잊은 듯하였다.
한껏 음악에 심취해 있다가 인터미션을 맞이하니 잠시 잊고 있었던 피로가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2부의 쇼스타코비치 '바비야르' (Shostakovich | Symphony No.13 in b-flat minor, Op. 113 ‘Babi Yar’)는 쇼스타코비치가 당시 금기의 주제였던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 '바비야르 학살'을 소재로 하여 이를 조명하고 추모하고자 만든 곡으로, 해학적인 요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무겁고 진중한 곡이다. 2부 연주의 1악장 '바비야르'의 시작은 제법 좋았으나 2악장 '유머' 연주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졌다. 듣는 이의 집중력을 한 데로 사로잡기에 어려움이 있어 보였고, 악장의 메시지가 안정적으로 전달되기에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3악장 '가게에서', 4악장 '공포'는 피로의 해일 아래 파묻혀 멍한 정신으로 겨우겨우 듣다가 5악장 '출세'에서는 슈카루파의 목소리에 정신이 확 깼다. 그의 날렵하고 훈훈한 외양과 대비되는 반전 목소리는 매우 진중하고 짙은 호소력을 지니고 있어 '바비야르'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매우 탁월하였다.
2부의 절반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감상했을지언정,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내게는 1부 '죽음의 섬', 그리고 2부 1악장 및 5악장의 감동이 또렷하게 남아 긴긴 여운을 품고 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국내 공연장에서 잘 연주되지 않는 곡을, 앞으로 다시 만날 기회가 극히 적을 것 같은 지휘자의 지휘로, (수준급의 연주는 아니었을지라도) 꽤 괜찮은 연주로 들었다는 사실이 매우 소중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날의 선곡이 전부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큼, 삶과 죽음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조용히 바라보며, 고민은 깊어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