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에 나는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언제 한 번 슈만 피아노협주곡을 한국에서도 꼭 연주해 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개인 SNS에서 한 적이 있는데, 어쩌다 보니 그 해 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의 내한공연에서 그는 슈만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였고 이어서 올해 봄에도 도쿄필하모닉과 함께 슈만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했다.
올해 내한한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정명훈 마에스트로의 지휘로 슈만의 피아노협주곡 Op.54 (협연: 조성진)과 베토벤의 5번 교향곡 Op.67 “운명”을 연주하였는데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연주였다. 정적인 연주를 보여줄 것이라고 감히 예상했었으나 (1부는 정말로 다소 소극적인 오케스트라 연주이긴 했다만) 의외로 매우 역동적이고 뜨거운 연주를 보여주어서 놀랐다.
1부는 내가 좋아하는 슈만의,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 협주곡 op.54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이 곡이 이토록 좋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상을 뒤엎고 매우 쫀득쫀득하고 드라마틱하게, 슈피협의 감성을 섬세하게 살려 맛있게 연주하였다. 작년 여름 리사이틀에서 연주했던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도 정말 좋았어서 놀랐는데, 가만 보니 의외로 조성진 피아니스트와 슈만의 합이 좋은 것 같다.
그는 협주곡이 끝난 후 앙코르로써 피아노를 거의 때려 부술 기세로 정열적인 영웅 폴로네이즈를 들려주었는데, 앞선 슈만의 곡과는 너무 상반된 분위기여서 개인적으로는 본 곡의 여운을 한순간에 모두 날려버리는 느낌이라 아쉬웠다. 모두들 그의 환상적인 영폴 연주에 환호하는 동안 나는 혼자서 “내 슈피협 감동 돌려내….” 하고 생각했다. 그만큼 슈만 피아노협주곡 연주가 좋았다는 거겠지.
2부 곡은 너무나도 유명하여 공연장에서 자주 연주되곤 하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이었다. 앞선 1부의 피아노협주곡에서는 협연자와의 합을 맞추기 위한 이유도 있겠지만 어쨌든 다소 소극적이고 정적인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려준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2부 교향곡에서는 앞선 연주와는 전혀 다른 무. 서. 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단원들의 집중력이 무서울 정도로 좋아 보였다는 것인데, 마치 ‘성공적인 연주’ 이외의 모든 생각이나 감정을 거세당한 것처럼 무서운 집중력으로 전력질주하듯 연주하는 광기 어린 모습이 몹시 흥미로웠다. 물론 모든 관현악단들이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매 연주에 임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 날의 도쿄 필하모닉에게서 본 그것은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피날레쯤엔 사람이 아니라 (연주에 특화된 종족의) 요정들이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협주곡도, 교향곡도 모두 기대한 만큼의 것보다 감명 깊은 연주였고, 특히나 도쿄필하모닉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기회였던 것 같아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후 도쿄에 여행을 가게 된다면 시간 내어 도쿄필하모닉의 연주를 꼭 듣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잡설이지만 정명훈 선생님께서 지휘하시는 뒷모습을 보며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매우 탄탄해 보이는 등과 곧은 허리가 돋보였는데, 체력 관리도 프로의 자질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나로선 그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