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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벌새날다 Jul 10. 2020

진은영, 그 머나먼

 머나먼

  진은영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동생 희영이보다 엘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게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게서, 침묵에게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구름에게서, 심장  검은 돌에게서
 
 
이 시를 읽으며 생각나는 단어는 동경, 이다. 憧憬. 동(憧)의 훈(訓)에는 어리석다, 마음이 정해지지 않다는 뜻이 들어 있다. 경(憬) 이 글자 자체는 생각하다는 뜻이지만, 다른 뜻으로 '멀다' 의 의미도 들어간다. 그저 동경이라는 두 글자의 한자 뜻 자체에, 거리감과 정처없이 떠돎의 정서가 스며 있는 셈이다.
 
이 시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멀리 있으니까, 좋아하는 마음, 그것이 동경이다. 멀리 있어서 그립고, 멀리 있으니까 생각한다. 닿지 못하니까 애틋하고, 닿지 못하니까 어쩌면 더 간절하다. 더 이상 젊지 않음, 이란 이름표가 붙을 시기부터 하염없이 떠다니기 시작한, 환타지와 같은 대상을 좇는 마음은, 그것이 너무나 내게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전에도 읽었었는데, 오늘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이 시를 다시금 읽는 마음은 또 다르다. 읽으며 내가 왜 그렇게 정신없이 떠돌고 있는지 정답을 발견한 것 같아서 그냥 좀 마음이 서늘했다. 오래 앓았던 풍치로 와삭하고 깨물은 얼음사과와 같은 느낌. 달콤하나 차고 시린. 마음을 한순간에 벼려내는.
 
어쨌든, 이 모든 것이 좋은 이유는, 그리운 이유는, 생각나는 이유는... 멀리 있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여기에서, 가족에게서, 어린 날 매질에게서, 나의 상처들에서, 나의 책상에서, 나에게서, 나의 분노에서, 집에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그리하여 이 시를 읽고 나면, 알 수 없는 슬픔이 스며들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고 동경하는 것이, 결국에는 닿지 못할 거리감 때문이라고, 결국은 어리석은 한 때의 마음의 바람일 뿐이라고, 남도 말하고, 애써 모른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나도 내게 말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가끔은 누구에게라도 호소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지금 여기서 생을 향유하며 살아가야만 한다는 정답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들로 떠돌고 있는 나의 해묵은 감상주의를 부디 용서해 줘요.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 닿고자 멀찍이서 손을 내미는 마음을, 한낱 에고의 거짓 속삭임이라고 그렇게 칼같이 잘라  정답만 말하지는 말아줘요. 지금 내가 힘써 붙잡아야 하고 건사해야 할 것들이 때로는 무겁게 느껴질 때, 내 오늘의 기쁨과 침묵과 내가 불러야 할 나만의 노래에게서도 잠시 떨어져 있고 싶을 때, 멀리 있어서 좋은 무엇들을 바라보는 열기 들뜬 나의 눈빛을, 가끔은 가만히 내버려둬줘요. 내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뒤돌아서서 언젠가 내 책상으로, 내 집으로, 나에게로, 나의 노래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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