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벌새날다 Jul 17. 2020

이성복, 극지의 시

이성복 님의 시론 <극지의 > 오랜만에 꺼냈다.  표지를 들치니 2015 12, 가장 중요한 시기에  책이 내게로 오다, 라고 씌어 있다. 2015 큰아이를 데리고  병원에서  진료대기줄을 기다리며  책을 읽었다. 웬만해선 책에 줄을 긋지 않는데도 줄이 그어져 있다. 그때의 위태롭고 흔들리던 마음을 말해주듯 줄이 삐뚤삐뚤하다. 책이란 같은 몸을 하고서도 시기마다 다른 언어로 말을 걸어와서, 이때 줄을 쳤던 문장들보다도, 그때는 심상히 넘기고 책을 덮었던 가장 뒷부분의 대담의  문단에 마음이 꽂힌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벽 아래서  호흡 한번 내쉬고, 우리는 없는 길을 가야 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고, 위로도 아래로도  있지 않은 길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오   우리나라 등반대  분이 안나푸르나에서 조난당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젊은 대원의 일기장이 발견됐는데, 거기 적힌 글이라 해요. 눈보라 치는 혹한의 텐트 안에서 어떻게 이런 글을   있었는지 도무지 상상이  돼요. 저는  글이 문학의 정수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을 한다는 것은 그처럼 세상에는 '없는 ' 가는 거예요. 상식적인 것은 전부 '있는 ' 이고,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에요.  길은 오로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거미처럼 스스로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해요. 저는  글을  때마다 나쓰메 소세키나 김수영을 생각하게 돼요. 그분들은 자기 자신을 '소처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글쓰기를 했어요.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길에서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거예요. 병뚜껑으로 하는 '땅따먹기' 놀이 아시지요. 멀리 가는 것보다 돌아오는   중요해요. 저는  일기를  때마다 할말을 잃어요. (이성복, <극지의 > 수록된 이우성님과의 대담 )

누구에게나 없는 길을 가야 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슬픔,  생에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두려움과 절망의 시기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 답이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길이 이랬겠구나 넌지시 짚어볼 수는 있어도 슬픔과 안타까움은 오롯이 자기만의 것이기에, 그렇게 없는 길을 가야  때가 있다.

그러나 길이 오로지  속에 있다. 길을 걸어나가고 슬픔을 가만히 바라보고 시간을 통과할 힘과 답이, 다른  아닌  사람 안에 있다.    크게 내쉬고,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며 하루의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의  속에 길이 있다. 행운도, 요행도 없었다고 느껴지는 쓰디쓴 시간을 지나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목놓아 우는 날들이 이어질지라도, 밀고 나가야 한다. 삶을, 간절한 바람을, 믿음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랬듯이 아이처럼  웃는 당신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김소연, 걸리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