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슈쿠라(Mo Chuisle)
'Mo Chuisle'
게일어로 '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매기(힐러리 스웽크)에게 입혀준 실크 가운에 새겨진 자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화에서 복싱 코치로 열연한 그는, 매번 선수들에게 훈련생 이상의 애정을 쏟고 선수가 잘못되었을 때 심한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캐릭터다.
그의 마지막 선수였던 매기에게 이 '모쿠슈라'라는 단어가 쓰인 실크 가운을 입힌다. 그 말뜻을 아는 관중들은 매 경기마다 그녀에게 열광한다. 두 사람 모두 가족에게는 철저하게 외면받은 외로운 존재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소중한 혈육'이라고 새겨진 가운을 입고, 시합에서 이길 때마다 마치 어린 딸이 아빠를 향해 장난치듯 웃음 짓고 달려가 안기는 매기의 모습이 더 훈훈하게 다가온다.
경기 도중 사고로 매기는 전신이 마비되고 입원한 상태에서 그녀의 소식을 듣고 뒤늦게 가족들이 들이닥친다. 그 가족들은 혹여 그녀가 준 돈과 집을 잃을까 봐, 병원비로 자신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두려워 변호사를 데리고 나타나 그녀를 괴롭힌다. 온몸이 마비된 그녀의 입에 펜을 물려 서명을 받으려다 실패하자 냉담하게 돌아선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녀의 곁에는 가족이 아닌 프랭키만이 남는다.
언젠가 한 여가수의 가족들이 방송에 나와서 그녀가 준 10억을 탕진한 게 아니라는 해명을 구구절절하게 한 기사를 읽었을 때,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물론 그 여가수는 다행히 매기 같은 비참한 처지가 아니었고, 당사자들이 아닌 다음에는 그 억울한 가족사의 진실을 명확히 알지 못하기에, 나는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알 길은 없다. 무엇보다 그 개별 사건 자체가 나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난 그저 돈이 사람을 망친다는 주변 반응에 대해, 돈이 사람을 망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망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가난하게 살 때는 문제가 없다가도, 돈이 많아지면 가족관계에 금이 가고 오히려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말이다. 물론 돈이 그 비극적 결말에 촉매가 될지는 몰라도 그 '비극적 서사'의 시작은 이미 그 관계 안에 고스란히 있었던 게 아닐까.
매기의 가족이 매기가 가난했을 때에도 행복했을까. 타인의 가족사를 자꾸 떠올려서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성공하기 전의 가족과 정말 달랐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덜 불행했던 관계가 어떤 이익이 개입할 때 더 불행한 관계로 치닫는다는 생각. 그와 더불어 '모쿠슈라'는 대부분 실제 혈연, 지연 같은 것들과는 무관하더라는, 혹은 오히려 가장 가까운 가족, 친척들이 가까이에서 서로를 괴롭히는 주범이 되기도 하더라는 현실을 직시할 뿐이다.
그래서 가족주의의 굴레는 종종 세상에서 부정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개별 인간사에 비극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현실을 외면하고 미화시키려 하고 상처를 드러내는 것을 터부시 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딸을 겁탈하거나 어머니가 채 성장하지 못한 자녀를 돈벌이에 떠밀어도, 형제와 친척 간에 재산 다툼으로 남남보다 더한 언사와 폭행을 행사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우리가 남이가'라며 가정 내부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그 안에서 해결하는 것을 큰 미덕으로 여긴다.
영화의 매 순간, 매기를 바라보는 프랭키의 눈빛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가족주의 울타리 안에서 더큰 외로움을 가졌던 그가 매기를 향해 보여준 시선, 손길, 짧은 말들 속에 스며든 깊은 애정.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모쿠슈라'의 현현으로 느껴졌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모쿠슈라'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가면을 쓴 가족주의의 굴레에 빠진 이 사회에서 정작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