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vs. 이민자'들'
<이민자>를 봤다. 훌륭한 영화였다.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 제레미 레너라니.
그 연기만으로도 이미 영화는 하늘로 올라선다. 이미 <투 러버스>에서 보여준 감독의 독특한 느와르적 분위기도 좋았고. 그런데, 뭔가 불쾌하다. 뭔가가...
그 뭔가를 찾기 위해 며칠을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듯 영화의 장면들을 이리저리 복기해보았다.
이 영화는 1920년대 미국으로 입국하려던 한 여성의 한없는 추락을 소재로 삼고 있다. 보는 내내 그 여성(마리옹 꼬띠아르)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 여성, 끝내주게 예쁘다. 예뻐서 더 안타깝다. (원래 그렇다..)
내가 그녀를 구해주고 싶을 정도로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영화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부르노 역의 남성은 이 이민 여성을 소유하려들고 클럽에서 춤을 추게 하고 결국 매춘에까지 끌어들인다. 하지만 '나쁜 남자' 부르노마저도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녀가 떠나도록 돕는다.
20년대 미국의 암울한 밤거리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한없이 추락하는 내러티브.
흥미롭게도 그 많은 댄서들과 매춘부들 중 영화 속에서 그녀만이 누드 장면이 없다. 그리고 다른 여성의 벗은 몸은 야하다기보다는 불편함 나아가 불쾌함마저 유발하지만, 유독 '예쁜 그녀'는 왜인지 '다른 이민 여성들'과는 다르다는 듯 벗은 몸으로 목욕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침실에 눕지도 않는다. (그저 2달러에 그녀가 팔리고 있다는 대사가 그녀의 몸을 대신한다.)
물론, 마리옹 꼬띠아르의 뛰어난 연기가 그 영화적 어색함을 무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속에서 언제나 그녀만이 안타깝고 그녀만이 빛이 난다.
나는 자주 영화를 평가하는 나만의 잣대로 영화 속 등장인물 중 특히 주변 인물들을 감독이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하는가에 집중하는 편이다. 특정 인물을 절대선 혹은 절대악으로 배치한다거나 주인공에게 전적인 내러티브를 내어주는 경우 대체로 나는 그 영화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결국 내가 불편한 지점은 그런 거였다.
'이민자'가 이민자'들'이 아닌 게 불편했다.
밑바닥 매춘부들로 전락한 이민 여성들의 면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지나갈 때 모든 남성들이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빼어난 외모의 여성 한 명의 몰락에만 몰입하고 애틋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그 구도가, 또 다른 소극적 '마초성'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를 보고 난 후 며칠 지난 오늘, 문득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