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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jay Mar 05. 2017

로건, 2017

'고려장(高麗葬)'

*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 명절 때면 제사를 지내러 큰집에 모였다. 제사를 끝내면 기다리던 세뱃돈을 받고 또 다른 친척집을 전전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집안의 친척 어른을 만난다고 큰아버지 이하 온 가족을 대동하고 그 집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그 어른들이 누구인지는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찾아간 집에서 만난 어른은 누워계셨다. 거동이 불편하신지라 만난 둥 마는 둥 한 채로 오래 앉아있지도 못하고 집을 나섰다. 


"정말 정정하신 분인데 안되셨어."
"그러게.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쓰러지셨대."


정장을 차려입고 눈매가 또렷한 큰아버지와 내 아버지, 그리고 작은 아버지들은 집을 나서면서 걱정 어린 말투로 이야기를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나는 그들이 걱정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들의 전성기를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그저 졸졸 따라다니던 나와 사촌동생들은 그저 코흘리개에 불과했다. 내 기억 속의 그들의 뒷모습은 마치 비틀즈의 음반 <Abbey Road> 표지와 같았다.   


재작년 즈음. 큰아버지에게 치매 증세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전해 들은 대로 큰아버지는 명절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가끔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곤혹스러워하셨고, 자주 와야 기억을 하지 않겠다며 특유의 위트로 비슷한 상황들을 모면했다. 하지만 집안에서 입지전적이면서 언변에 능하셨던 그분이 "이럴 때 멋진 말을 해야 하는데 생각이 안 난다"라고 말할 때 나는 웃지 못한 채 잠시 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작년 연말에 연락이 왔다. 큰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했고 얼마 뒤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다고 했다. 누나와 함께 찾아갈 즈음엔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기신 후였다. 병실 문을 들어서자 마치 애비로드를 걷던 비틀즈의 이미지처럼, 정장에 빠른 걸음걸이가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는 큰 아버지는, 그저 내 앞에 누워만 계셨다. 반갑게 말을 건네셨지만 큰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미국에 사는 부부라고 생각하셨다. 


병실을 나와서 사촌 누나와 셋이 앉았다. 

"정정했는데..." 

누나가 말문을 여는데 나는 30년 전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어르신을 걱정하던 아버지들은 그 어르신의 나이가 되었다. 큰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도 충격이었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데자뷔처럼 투영된 두 세대의 겹친 그림 때문이었는지. 문득 내 아들은 나를 보며 전성기라고, 내 어른됨을 뽐내고 있다고 생각할까, 생각했다. 


집안 이야기가 길었다. 

알려진 대로 <로건>은 휴 잭맨이 울버린을 연기하는 마지막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지만 그 사이 뮤턴트들은 모두 죽거나 사라졌고 '프로페서X'는 기억이 온전치 않으며 울버린 역시 몸이 나약해졌다. 은퇴 후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은 절망감과 무력감이 영화의 미장센 전반을 지배한다. 암울한 정서는 흘러가고 결국 마지막 두 엑스맨은 이 영화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언제나 여유롭고도 냉철하며 사리분별이 뛰어났던 프로페서X는 발작 때문에 약물에 의존하는 나약한 노인이 되었다. 그의 노쇠함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기까지 한다. 로건은 어떤 싸움에도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으며 그저 어서 빨리 돈을 모아 보트 한 척을 사서 조용히 두 사람의 말년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 엑스맨 수트가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모습의 두 사람의 최후다. 

엑스맨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 마블코믹스의 대표 캐릭터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위시한 이른바 '어벤저스팀'과 더불어 뮤턴트 '엑스맨'은 마블 군단을 이끌어 온 한 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엑스맨은 1963년에 탄생한 이래 수십 년간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2000년 엑스맨1을 시작으로 시리즈 영화가 만들어졌다. 마블 캐릭터들을 사랑하던 아이들이 자라서 중년이 되었고 결혼을 하여 아이들을 낳았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극장을 찾아왔다. 아이언맨, 배트맨이 갑부이자 중년으로 설정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1950년대에 코믹스를 보며 자란, 지금은 중년이 된 '아이들'이 여전히 그 내러티브의 소비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중년의 히어로들이 지구를 지키기에는 더 '현실적'이면서도 복잡한 내러티브를 소화할 수 있는 인간적인 면, 이를테면 정치적 입지, 가정사, 섹스를 포함한 남녀관계와 그 자녀 히어로들까지 그 세밀한 지점에서의 인간적 고뇌들을 부각할 수 있었기에 같은 세대 중년의 무게감을 느끼는 코믹스 키즈들에게도 여전히 흥행을 보장하는 상품이 되어왔다. 하지만 그들이 50대, 60대가 된다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동일하게 중년의 연기자들이 늙어가는 것도 문제다. 그건 더 이상 '쫄쫄이 수트'를 입을 수 없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다크나이트 리턴즈'에서 배트맨이 은퇴 후 되돌아온 적이 있지만 다시 은둔하며 젊은 자경단을 훈련시키는 역할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그간 마블 코믹스와 마블 스튜디오는 시공간을 흔들면서까지 여전히 시장성, 상품성이 있는 그간의 캐릭터들을 부활시켰고 재사용해왔지만 이제 슬슬 한 시대를 마감해야 함을 직감하고 있다. 문득 여전히 살아낼 수 있지만 산속으로 내몰려졌던 '고려장(高麗葬)'이 떠올랐다. 절대 죽지 않던 대표 히어로들의 고려장. 그 시작을 나는 <로건>으로 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조금 더' 히어로일 수 있지만 배우와 캐릭터, 회사 모두 산송장으로 역사를 마무리짓기를 합의했다. 곧 다른 캐릭터들도 조만간, 정확히 말한다면 '노년이 오기 전에' 무대 밖으로 내몰릴 것이다.

로건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조금은 어불성설, 혹은 지나친 과장이 될 것이다. 물론, 마블 스튜디오는 울버린에게 예우를 갖춰주었다. R등급으로 상향하고 17년간 상상으로만 그쳤던 팔, 다리, 머리가 날아다니는 전투신을 충분히 과하게 살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멋있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게 블록버스터인가 싶을 정도로 영화는 인디적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며 친척 어르신과 큰아버지를 동시에 떠올렸다. 그리고 '아직은' 힘차게 걷고 있는 내 걸음걸이를 돌아보았다. 이른바 '신고려장 시대'에 언제까지 애비로드를 걷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문득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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