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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Anne Dec 09. 2023

뭔가를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작은 가능성에도 성실해진다.

뭔가를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작은 가능성에도 성실해진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에서...

자꾸 내 가방에는 누구를 위한 무언가가 추가되기만 하고 비워지지는 않는다.


딸기 맛 립밤은 입술을 자주 뜯어먹는 친구가 좋아해서 매번 나를 만날 때마다 빌려줄 수 있냐고 묻기도 하지만 키가 큰 그 녀석과 언제 할지 모를 첫 키스의 딸기 맛을 위해서 내 파우치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한 달 전 인사동을 걷다가 발견한 나무향이 진했던 상점에서 ‘고체 향수’라는 단어에 이끌리듯이 집어 들었던 동그랗고 자그마한 통. 왠지 가슴 뛰는 순간이 찾아올 때를 대비해 언제든 손목과 귓볼 뒤 맥박이 뛰는 곳에 톡톡 두들기듯이 바르기 위한, 생각만 해도 설레는 머스크 향을 품고 있는 고체향수 볼.


미소가 예쁜 선배가 도서관에서 스치듯 물었던 내 만년필 잉크의 색깔. 그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종종 내가 알고 있는 여자들보다 훨씬 더 예쁘다는 생각에 넋을 놓고 보게 된다. 침이라도 흘릴세라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깨워야 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노트에 메모를 하고 있었는데 잠깐 펜을 좀 빌릴 수 있겠냐며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예쁜 미소 선배는 내 만년필을 빌려가고는 잉크색이 독특하고 매력적이라며 꼭 너 닮은 걸 쓰는구나 했다. 그리고는 내게 자기도 아끼는 만년필이 있는데 괜찮다면 내 잉크를 채워 넣고 싶다고 했다. 우리 언제 다시 마주칠 수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가방에 뭔가가 자꾸 들어가는 것은 뭔가를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혹시라도 있을 작은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치는 간절한 성실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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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맛립밤 #고체향수 #만년필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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