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소거버튼 장착

by 미오


벌써 15분째 무슨 일인지 버스가 오지 않네요. 덕분에 정류장 앞 은행 나무의 작은 새순들도 바라보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새들의 움직임도 흐믓하게 지켜보았으나 시간이 계속 흐릅니다


버스 앱을 켜서 예상 시간을 확인해 보니 5분 뒤 도착. 내가 맞이할 버스 뒤로 또 한 대의 버스도 10분이상. 배차시간이 깁니다.


예사롭지 않은 날. 막히지 않을 때는 쌩쌩 달리지만 국도를 지나다 보니 피치못할 변수가 생기면 도로에 꼼짝마라 상황이 연출됩니다. 지난번 터널 앞 산사태가 발생했을 때 도로에 덮힌 토사와 돌맹이 때문에 상당한 교통체증이 유발됐던 적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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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남은 좌석에 운좋게 자리를 잡습니다. 늘 앉던 자리는 아니지만 감지덕지. 음악을 들으려고 가방을 뒤적이는데 아뿔싸! 이어폰이 없습니다.


버스를 타면 항상 귀에 버즈를 낍니다. 오늘은 중간 좌석인데 큰일입니다. 스피커가 바로 위에 있네요. 시간이 흐를수록 오감을 자극하는 소리들이 일정 간격으로 지속됩니다. 펼쳤던 책을 덮고 그 소리에 집중해 보기로 합니다


띵~동

이번 정류소는 000입니다

다음 정류소는 000입니다.

띵동 띵동(벨 누르는 소리)

승차입니다./환승입니다(교통카드 찍는 소리)

손잡이를 꼭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하차입니다/이미 처리되었습니다.

승객 여러분 카드를 대지 않고 내리시면 추가 요금이 발생합니다 하차하실 땐 반드시 카드를 대어 주시기 바랍니다

띵동 띵동

이미 처리되었습니다/하차입니다/이미처리되었습니다


정체 구간은 지속되고 오늘 따라 버스 안에 라디오나 음악조차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돌림노래처럼 들려오는 기계음은 내 귀에 깔때기를 놓은 듯. 소리분자가 되어 귓속으로 속절없이 날아듭니다.


일정 간격으로 흐르는 안내방송은 그나마 들을만한데 문제는 교통카드 찍는 소리!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한정된 공간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한채 딴청을 부려봅니다.

내 마음 결정권은 나에게 있으니까요.


하차입니다. 이미 처리되었습니다의 음소거 버튼을 꾹 누르고 눈을 감습니다.

SE-35e49eae-e44a-4902-bc24-a844b9bf5b02.jpg?type=w1 © abey22, 출처 Unsplash

음소거 버튼이 눌려지니 토큰과 회수권이 고개를 내밉니다.

토큰은 아빠의 호주머니 짤랑거림 소리와 함께, 회수권은 내 책상 위 지갑 안에 놓여있습니다.

회수권의 절취선을 기술적으로 자르면 하나가 더 만들어진다고 꼼수를 부리던 친구의 말에 절취선이 빗겨난 회수권을 내밀어 보는 소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콩닥콩닥.


학생! 하고 부르는 소리에 순간. 얼굴이 화끈화끈


부끄러움에 눈을 질끈 감고 살짝 뒤를 돌아보니 머리를 긁적이는 남학생이 보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짓고 자리에 착석했지요. 아저씨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남학생은 반쪽짜리 회수권을 접어 넣었기에 딱 걸렸습니다. 괜스레 떨었던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불편한 마음.


그 마음이 느껴져 딴청을 피우듯 기억 속에서 슬며시 빠져나옵니다.




차창 밖을 보니 수신호 하는 경찰이 보입니다. 옆으로 눕혀진 차량에는 다행히 사람이 없습니다.


사고가 크게 났었구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한 정체 구간임을 알게된 사람들은 여기저기 전화로 상황을 알립니다.


“기사 양반, 고생했네 ..”


버스 기사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브레이크를 계속 밟으며 운전하느라 발 아팠겠다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아저씨의 피로도 풀리셨겠지요.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어요


본인의 남편이 운전기사였는데 그때는 버스 안내원도 있었다고 큰 소리로 옛날 이야기를 풀어내시네요. 할머니의 목청은 때마침 켜놓은 라디오의 음악과 뒤섞이고, 버스 안에 주된 소리들은 색색의 비빔밥 재료처럼 버무려지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버스 안에서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싶던 날. 교통카드 단말기를 대신할 회수권의 부활을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무수한 소음에 해방을 간절히 바라던 나. 앞으로는 음소거 버튼으로 이어폰을 꼬옥 챙겨 다니리라 다짐해 봅니다.


문득, 이 모든 소음을 매일 견뎌내시는 아저씨의 노고를 생각하게 되네요.

오리주둥이처럼 예민했던 내 귀를 쏘옥 들이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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