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편의 시詩, 패터슨

<패터슨> - 짐 자무쉬 (2016)

by 물비늘

당신은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고민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영화라는 매체는 문학이나 음악 등 어떠한 문화예술 장르보다도 감각적이기 때문에 몰입이 잘되어 소위 ‘시간 때우기’ 용으로 보기 좋다.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로부터의 도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의 특성은 오히려 영화만이 가지는 강점이 될 수도 있다. 영화는 인간 삶의 한순간을 카메라라는 기계로 객관적으로 포착하여 그대로 보여준다. 객관적으로 포착된 이미지들은 관객에게 어떠한 인상과 여운을 남기며, 영화 크레딧이 올라오는 순간부터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들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영화가 주인공과 그 서사에 대하여 명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나는 영화에 애정을 갖게 되었다.


짐 자무쉬의 <패터슨>은 그중에서도 영화의 관조적인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왓챠에서 이 영화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었다는 정보만 보고,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이 영화를 처음으로 보았다. 처음에 봤을 때는 지루해서 졸았지만, 여운이 계속 남아 왓챠 플레이로 몇 번이고 반복해 보다가 결국에는 전공시험 전날에 아트나인에서 보고 올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영화다. 영화 <패터슨>은 패터슨이라는 소도시에 사는 패터슨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배우 애덤 드라이버가 버스 드라이버 역으로 나오고, 그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시집 <패터슨>을 가장 좋아한다. 패터슨은 버스를 운행하기 전이나 퇴근 후 짬을 내서 일상 속 소재들로 시를 쓴다. 그의 일상은 가끔씩 쓰는 시와, 매일 6시쯤 일어나, 버스를 운전하고, 집에 돌아와 아내 로라와 저녁을 먹은 뒤 개 마빈과 산책을 하고, 단골 바에서 맥주 한 잔을 하고 잠드는 일과로 이루어져있다. 영화는 이렇게 단조로운 그의 일상이 월화수목금토일 어떻게 변주되는지, 그 매일매일의 일상을 보여주고, 끝난다. 이렇게만 들으면 정말 아무 내용도 없는, 무의미한 영화일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순간들을 담고 있다.


패터슨은 출근 직후, 버스가 출발하기 전 짬을 내어 시를 쓴다. 이때 버스 운전사들을 관리하는 도니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그 둘이 싸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도니는 매일같이 ‘무슨 일 있냐’는 패터슨에게 ‘안 괜찮다’며 자신이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을 늘어놓는, 원래 투덜거리는 사람이었고, 패터슨은 ‘그러는 너는?’하는 도니에게 ‘난 괜찮아’라고 대답하는, 원래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이 영화의 음악도 나를 착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패터슨이 출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사 없는 몽환적인 음들이 울리는데, 나는 일반적인 영화의 문법을 바탕으로, 영화 시작부터 나오는 이 음악이 불행한 사건의 징조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패터슨은 덤덤한 표정으로 버스를 운전하기 시작했고, 많은 풍경들이 화면을 스쳐 지나갔다. 패터슨은 승객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기도 했고, 승객들을 이따금씩 쳐다보며, 미소짓기도 했다. 감독은 그저 몽환적이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비롯해 나는 처음에는 이 영화의 언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영화의 언어와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 자무쉬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간결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강렬한 드라마나 충돌, 액션이 포함되지 않은 그런 영화 말이다. 여자가 희생되고, 자극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에 대한 해독제 같은 작품이 되었으면 했다.”


<패터슨>의 언어가 바로 와닿지 않았던 이유는, <패터슨>이 시詩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패터슨은 영화 속에서 시를 쓰는 인물이고, 주변 풍경들과 시상들이 오버랩되는 화면 위로 그가 자신의 시를 낭독하는 나레이션이 깔린다. 버스 운전사의 시각에서 본 도시와 도로의 풍경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시인 패터슨이 어떻게 세상을 관조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다. 비록 ‘느낌적으로’ 알 것 같은 것 뿐이라도 말이다. <패터슨>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다른 이유는 이 영화가 패터슨의 반복되는 일상을 변주하여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관객은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 아침에 패터슨과 아내 로라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나며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을 본다. 마치 시에서 운율이 반복되고, 비슷한 구절이 조금씩 변형되며 반복되듯이, 이 영화는 한 편의 시와도 같다. 우리는 주인공 ‘패터슨’의 시를 경험함과 동시에, 영화 <패터슨>이라는 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감독은 패터슨이 ‘부유하는’ 듯한 인물이라고 한다. 자신이 로라에게 하려던 말을 잊기도 하고, 멍하니 ‘오하이오 블루 칩’ 성냥을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리기도 한다. 패터슨이 쓴 시들은 일상적인 소재에서 출발하지만 사랑과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에서 끝난다. 아침에 로라가 자신이 쌍둥이를 낳는 꿈을 꾸었다고 하자, 패터슨은 출근길에 마주친 사람들이나 버스 승객들 중에 쌍둥이들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는 승객들이 버스에서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감독은 패터슨이 머무는 시선들을 따라가며, 응시한 대상들을 몽환적으로 오버랩하여 보여준다. 패터슨은 일상 속에서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시를 머릿속으로 구상한다. 이러한 샷들은 패터슨의 어떠한 생각이나, 감독의 특정한 의도를 담고 있지 않다. 패터슨의 관심은 자기 삶 속에 여러 대상들 사이를 계속해서 부유하며, 여러 심상들을 자아낸다. 패터슨의 이러한 삶에 대한 관조적 태도는 영화 감독이 패터슨을 바라보는 관조적인 태도와 비슷하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는 행위는 ‘관조를 관조한 영화’를 관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나도 내가 패터슨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주관이 뚜렷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스스로 내 생각을 반박하기도 하며, 그 혼란이 나를 어지럽혀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잘 전달하지 못한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사고가 불연속적으로 연결되며,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어떤 장면이나 풍경들, 내가 접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부터 어떤 감각적인 인상을 받는다. 패터슨이 무표정하게, 그러나 때로는 미소지으며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표정은 내가 살아가며 짓는 그 표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살아가면서 내가 느끼는, ‘영감’이나 ‘감정’이나 ‘의견’이라는 말로는 쉽게 치환할 수 없는 그것들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한때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어 그런 것들을 해소해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사실은 아직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마음 한 켠에 조용히 간직하고 있다. 패터슨은 자신의 부유의 과정을 기록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로 부러운 사람이다.

혹자는 패터슨이 아무 생각 없이, 단조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냥 주관이 없는 사람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나는 패터슨이 정확히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다. 그 대신 주관을 갖는 것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하자면, 뚜렷한 주관을 갖는 것은 중요하긴 하지만, 동시에 뚜렷한 주관으로 인해 상대방을 멋대로 재단하거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뚜렷한 주관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가 짐 자무쉬가 부정적으로 생각한 ‘폭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패터슨이 자신의 삶 속 여러 대상과 주체들을 관심있게, 그리고 애정 어리게 바라보는 그 시선을 긍정한다. 패터슨은 자신과는 달리 충동적이고 도전적인 아내 로라를 있는 그대로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며, 그녀가 하는 일 모두를 지지하고 응원해준다. 바 주인 닥이 하는 얘기에는 흥미를 갖고 임하며, 전 여자친구에게 집착하고 심지어 그녀와 다시 사귀기 위해 카페에서 장난감 총으로 사람들을 협박한 애버렛에 대해서도 별 다른 감정을 갖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혐오’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과 남성이 대립하여 서로를 향해 거친 말들을 내뱉고, 정치인이 동성애에 찬성하네 마네 하며 서로 논쟁을 하며, 장애인, 노동자, 저소득층 등 많은 약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언어들과 차별이 난무하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섣부르게 명확한 입장을 취하고 감정에 휩쓸려 의견을 내뱉기 보다는, 우리의 말들이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며, 복잡한 이해관계들을 관조하는 태도로 파악한 뒤, 우리의 주관을 개입시켜야 할 것이다. 물론, 아무런 의견을 갖지 않고 마냥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문제의 해결과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일상 속에서 나도 모르게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오해하곤 한다. 내 안에 있는 고정관념들과 때때로 마주하며, 죄책감을 느낄 때가 많다. 타인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내 생각을 돌아보고, 고쳐나가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패터슨>은 대상에 대한 ‘관조’와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태도의 미학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영화가 한 편의 ‘시詩’와도 같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시는 언어를 대상을 지칭하는데 활용하지 않고, 언어 안에 추상적인 의미가 감상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시적으로’ ‘부유’하는 삶의 방식은 때로는 나를 불안정하게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계속해서 부유해 나갈 것이다. 부유하며 내 삶과 사회의 많은 주체들을 ‘인정’하는 태도로 관조할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시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나만의 ‘시詩’를 써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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