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는 누가 발견했는가?
4개의 '~라면'과 1개의 '~다'
지금 프랑스에서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직지’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시중이다. 직지는 20세기 초 프랑스로 건너가 여러 곡절을 거치면서 오늘날 세계최초 금속활자란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72년 까지만 해도 여러 사람이 직지가 중요한 책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모두 그것이 세계최초 금속활자라는 걸 확신하지 못하였다. 항상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계최초’라는 가정법을 사용했다. 이 ‘~라면’이란 꼬리표를 떼는 데는 한 사람의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1. 플랑시 ‘~라면’
묻혀있던 직지가 알려진 건 19세기 전후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플랑시(1853~1922)에 의해서였다.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여러 책들을 수집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직지였다. 한자를 읽을 수 있는 블랑시는 책을 살펴보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책 끝에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펴냄 ’이라고 쓰여 있었다. 독일의 쿠덴베르크보다 78년이 앞서기 때문이다.
블랑시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구입한 직지의 책 표지에 프랑스어로 ‘가장 오래된 한국의 금속활자, 1377년’이라고 썼다. 그러나 플랑시는 이것을 확신하지 못한 것 같다. 이 책이 진짜인지 아닌지, 금속활자로 찍어 낸 것이 맞는지 고증하지 못했다. 직지가 1900년 프랑스 파리박람회에 출품했다는 논란이 있는데 그렇다하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 같다.
2. 쿠랑 ‘~라면’
모리스 쿠랑(1865~1935)은 당시 플랑시가 공사로 있던 프랑스 공사관에서 한국 도서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1896년에는 3권의 <<한국서지>>를 펴내기도 했다. 직지는 1901(1902?)년 이 책의 부록에 언급되었다. 쿠랑은 플랑시로부터 직지를 건네받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쿠랑도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플랑시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던 쿠랑도 이 책이 1377년에 금속활자로 찍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쿠랑은 자신의 책에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3. 베베르 ‘~라면’
1906년(또는 1900년 파리박람회 때) 프랑스로 건너간 직지는 골동품 상인 베베르에 넘어갔다. 상당한 금액인 180프랑에 넘어갔다. 플랑시나 쿠랑보다 돈(?)에 관심이 많았을 베베르는 ‘라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베팅을 했던 것 같다. 한자를 모르지만 플랑스가 직지 표지에 쓴 ‘금속활자 1377’에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베베르가 ‘라면’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는 없었다. 베베르는 죽을 때 아들에게 이 책을 넘기면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라고 하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라면’의 꼬리표를 떼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4. 프랑스 국립도서관 ‘~라면’
베베르의 아들에 의해 195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도서관에서도 당연히 플랑시가 책 표지에 쓴 ‘금속활자 1377’란 글자를 보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본을 소장하게 됐다는 것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자랑 중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금속활자 1377’년을 확신하지 못하였다. 고증해서 ‘라면’이란 두 글자를 없애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설마 구텐베르그보다 앞서는 금속활자일까라고 의심하고 싶은 무관심이었을 수도 있다.
5. ‘~라면’이 아니라 ‘~다’
한 사람이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임시사서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프랑스에서 또 다른 관심을 두었던 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서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였다. 외규장각 의궤를 찾는 과정에서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직지’였다. 바로 그 사람이 박병선이다. 1967(?)년쯤이다.
혁명은 우연히 다가오는 것인가. 그녀도 ‘직지’를 보고 놀랐을 것이다. 어쩌면 직지가 그녀를 보고 더 놀랐을 지도 모른다. 1906년 고국을 떠나 60여년 만에 고향 사람의 손길을 느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사람이 나를 알아주고 나를 고국에 돌아가게 해 줄 거라는 희망도 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활자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라면’을 떼기로 결심했다. 관련 자료를 얻기 위해 고국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고국은 경제발전에 여념이 없었다. 도움은 커녕 관심도 없었다. 박병선은 일본자료와 중국 자료를 구해서 공부했다. 혼자 힘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직지의 몇 장을 사진으로 찍어서 같은 글자를 서로 비교해 보았다. 목판이라면 사람이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새겼기 때문에 완전히 똑 같을 수 없다. 금속활자라면 같은 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거의 완전히 똑같아 보인다. 그런데 직지에 보이는 같은 글자는 똑 같았다. 금속활자는 활자를 만들 때 금속찌꺼기가 남게 된다. 박병선은 이것을 ‘쇠똥’이라고 불렀는데 직지에서도 이것을 확인해 내었다. 종이가 고려시대 종이라는 걸 같은 시기 일본책과 비교하여 밝혀내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프랑스 국립도선관은 1972년 세계 책 전시회에 ‘직지’를 출품하였다. 드디어 ‘라면’을 뗀 ‘다’로 전시하였다. ‘직지는 1377년 찍은 금속활자다.’ 전시회가 난리가 났다. 여기 저기 아우성이다. 아니 듣도 보도 못한 나라 한국의 직지가 어떻게 구텐베르그보다 앞선 금속활자가 될 수 있느냐. 생각보다 논란이 커지자 도서관 측은 책임을 박병선에게 넘겼다. 박병선이 자의로 ‘라면’을 떼고 ‘다’를 붙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숱한 질문 속에서도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란 것을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박병선은 이 일을 계기로 프랑스 도서관을 떠나게 되었다.
30년 뒤 2001년 직지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란 타이틀로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리고 2023년 50년 만에 지금 프랑스에서 쿠덴베르크의 활자와 함께 전시 중이다.
왜 50년이나 걸린 것일까. 아쉽게도 박병선은 2011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전시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가 죽은 뒤 전시되어서일까. 지금 프랑스와 한국에서 박병선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프랑스 도서관과 프랑스 학자들의 입장을 우리나라 한 신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플랑시가 직지를 구입해 프랑스에 가져갈 때부터 금속활자로 만든 가장 오래된 책임을 알고 있었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전시될 때도 ‘금속활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으로 소개했다.”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이 1901년 펴낸 “한국서지”에도 직지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라는 언급이 있다.”
한국인 학자들도 거들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도서의 가치를 알고 귀중본으로 관리해왔기 때문에 박병선 박사가 ‘직지를 발견’했다는 건 과장을 넘어 왜곡”
“이제라도 잘못 알려진 진실은 시정돼야”
프랑스 국립도서관도 ‘고증 확인’하지 못했고 한국의 학자들도 ‘고증 확인’하지 못한 직지를 일개(?) 박병선이 ‘고증 확인’해서 일까. 우린 우리가 ‘고증 확인’한 직지를 굳이 왜 프랑스 사람과 프랑스 도서관이 마치 먼저 ‘고증 확인’한 것처럼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는 걸까. 자신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박병선이 먼저 발견한 것에 대한 자격지심일까.
플랑시, 쿠랑, 베베르, 프랑스 도서관 모두 ‘라면’으로만 알고 있었을 것을 박병선이 처음 ‘다’로 만들었다. 모두다 ‘금속활자라면’이라고 했을 때 ‘금속활자다’라고 밝혔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것이다.
아! 박병선
1972년 프랑스 도서관에서 물러난 그녀는 이용자 자격으로 1975년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하였다. 그녀의 공으로 2011년 5월 외규장각 의궤는 영구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되었다. 하지만 박병선은 끝까지 외규장각 의궤의 한국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해 11월 박병선은 직지와 의궤를 뒤로 하고 눈을 감았다.
추기)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귀한 자료를 접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자료가 '처음' 접하는 자료일 경우 그것을 믿을 수 있는지 아닌지 확신하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이때 누군가 이 자료가 확실하다는 걸 밝혀냈습니다. 이런 경우 이 자료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부끄러운 일이지요. 나는 고증 확인을 못했으니까요. 누군가가 고증 확인했다면 그가 발견했다고 해도 아무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병선 #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