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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만의한국사 Mar 08. 2022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군’이 들어간 세 왕이 있었다.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이다. 노산군은 숙종 때 단종으로 복권되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여전히 군으로 남아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났고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반정(反正)은 ‘바르게 돌려놓다’는 뜻이다.


연산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던 박원종은 신수근을 찾아갔다. 박원종은 신수근과 장기를 두는 데 장기 알의 ‘궁(宮)’을 서로 바꿔 놓았다. 신수근에게 반정에 참여해 달라는 표시였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다. 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다. 장차 연산군이 폐위되면 신씨도 폐비가 되고 신수근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반정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원종은 왜 반정과 같은 일급비밀을 연산군의 처남이자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에게 알려주고 같이 참여하자고 했을까.


실은 신수근은 박원종이 장차 왕으로 추대할 진성대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신수근의 딸 신씨는 반정이 성공하면 나중에 진성대군(중종)의 부인 곧 왕비가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박원종은 왕의 장인이 될 신수근에게 반정을 알리고 자기편에 서달라고 한 것이다. 신수근은 누구 편을 들었을까. 여러분은 누구 편을 들겠는가. 신수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처했다. 여동생을 택하면 딸이 죽고, 딸을 택하면 여동생은 죽게 된다. 그래도 여동생보다 딸이 가깝지 않았을까. 당연히 반정 편에 서서 자신의 딸은 왕비가 되고 왕의 국구(國舅)가 되어 영화를 누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신수근은 장기판을 엎었다. “차라리 나의 목을 베라”고 말했다《연려실기술》. 신수근은 여동생 편을 들었다. 연산군 편에 섰다. 그렇다고 박원종은 곧장 신수근을 죽이지 않았다. 신수근도 반정을 연산군에게 알리지 않았다. 운명을 역사에 맡겼다. 아니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반정은 성공했다. 진성대군이 왕이 되었고 연산군과 여동생 신씨는 폐위되었고 신수근도 죽임을 당했다. 신수근은 여동생을 택하였지만 딸도 구해내지 못했다. 진성대군이 왕이 되자 신씨도 왕비(단경왕후)가 되었지만 곧 폐비가 되었다. 역적 신수근의 딸이 왕비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신수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떠했을까. 《중종실록》에는 신수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신수근은 폐비 신씨(愼氏)의 오빠로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 세력과 지위가 극히 융성하니, 권세가 한때를 휩쓸었다. 오랫동안 이조를 맡아 거리낌 없이 방자하였으며, 뇌물이 폭주하여 문 앞이 저자와 같았고, 조그만 원수도 남기지 않고 꼭 갚았다.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이 다투어 와서 그에게 투탁(投托)하였으며, 호사를 한없이 부려 참람됨이 궁금(宮禁)에 비길 만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영조실록》에는 신수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금동충(古今同忠) 출처: 양주향토문화대전

임금이 ‘고금동충(古今同忠)’이라는 글자를 써서 내려 주고 이르기를, “신수근(愼守勤)은 포은(圃隱)과 함께 충의가 같다.”하고, 호조에 명하여 사우(祠宇)를 만들어 주고 그 곁에 각(閣)을 세워서 이것을 새기어 걸게 하라고 하였다.


영조는 신수근의 충절이 포은 정몽주와 같다고 하였다. 옛날 정몽주의 충이나 지금 신수근의 충이나 모두 한 가지란 의미로 ‘고금동충’이란 친필을 써서 신수근의 사당에 내리기도 했다. 정몽주가 고려의 충신이라면 신수근은 조선의 충신이라고 치켜세운 것이다. 신수근에 대한 최대의 찬사였다. 역사에 대한 평가가 중종 때는 권세가였고 영조 때는 고금의 충신으로 정반대였다.    


사실 신수근이 택한 건 여동생이나 딸이 아니었다. 연산군을 택한 것이다. 중종을 택했다고 해서 욕할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연산군을 택하였다. 연산군은 신수근의 주군이었다. 연산군이 정치를 못해서 쫓겨나면 그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고 여긴 것이다. 연산군을 구해낼 수는 없지만 연산군과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인생과 역사는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때는 목숨을 건 선택일 수도 있다. 어느 선택이든 떳떳한 선택이어야 한다. 얼마 있으면 나라의 방향을 정하는 대통령 선거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여론도, 진영논리도 아닌 나만의 책임 있는 선택이 있을 뿐이다.


글. 역사학자 조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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