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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딩 숲속 월든 Mar 18. 2023

오늘 하루 내 살림살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5시 반 첫 차를 타고 출근한다. 출발역이라 늘 앉아서 갈 수 있다. 예전엔 도착역까지 40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봤는데, 지난해 가을 작정하고 보림*을 시작한 뒤부터는 눈 감고 가만히 앉아서 간다. 피곤하면 졸기도 하는데 잠은 잘 오지 않고, 의도치 않게 생각을 지켜보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 보림(保任) : 불교용어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키는 과정


회사 근처 헬스장에서 1시간가량 운동을 하는데, 주로 러닝머신에서 달리기나 인클라인 걷기를 한다. 예전에는 운동시간 동안 동영상을 보거나 신나는 음악을 들었는데, 보림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운동에만 집중한다. 지금은 그게 훨씬 편하다. 맞은편 거울에 비친 천장 조명에 시선을 집중하기도 하고,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과 다리 근육에 느껴지는 자극에 집중하기도 한다.


짙은 생각이 들 때는 '놓이고 물러나기', '지금 여기 저절로' 등을 의도적으로 되뇌기도 한다. 규칙적으로 호흡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예전에 촛불을 켜놓고 좌선을 했던 것과 비슷한 '수행'스러운 속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단, 좌선을 할 때는 수행이라는 목적의식이 분명했다면, 운동은 원래 땀 흘리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보니 의도적으로 수행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사무실 도착 후, 업무 시작 전 1시간이 꿀 같은 자유 시간이다. 운동하는 1시간이 조여지는 시간이었다면, 이 1시간은 놓이는 시간이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빈 종이에 자유롭게 스케치하기도 하고, 배설하듯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휘갈겨 써보기도 한다. 꼭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보낸다.


Nine to Six. 이후 8시간 동안은 직장인 배역을 충실하게 연기한다. 상사에게 쪼임 당하고, 후배들 갈구며 티키타카 하고, 머리 쥐어 짜내며 보고서를 쓴다. 예전에는 이런 삶이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느껴졌으나, 지금은 이런 삶도 생계수단으로 크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일에 대한 몰입도도 전보다 많이 높아졌다.


일을 하는 중에 긴장이 유발되는 상황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이 일어난다. 주로 목과 어깨 부위의 경직이 느껴지는데, 어깨를 최대한 위로 웅크렸다가 툭 떨어뜨리면 이완에 도움이 된다. 이게 잘 통하지 않을 만큼 긴장의 강도가 높을 때는, 의도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소리에 주의를 돌려서 생각을 환기시키는데, 효과가 꽤 괜찮다.


이른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다 보니 퇴근 시간대가 되면 체력과 의지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가 된다. 예전엔 지하철에서 주로 유튜브, 넷플릭스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보림 이후부터 지금까지 가급적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요즘은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기도 하고, 운 좋게 자리가 나면 앉아서 졸면서 온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 문을 여는 순간 두 마리의 아스트랄체*(8살 남매 쌍둥이)가 달려든다. 나 또한 한 마리의 야생동물이 되어 한바탕 뒹굴다가, 그들이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잠자리에 들 때 함께 잠자리에 들면서, 그렇게 오늘 하루 생(生)을 마무리한다.


* 아스트랄체 : 오컬트 용어이나 여기에서는 합리적 이성이 배제된 동물상태의 인간이란 의미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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