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현상(구교환 분)
쫓고 쫓기는 영화가 식상하고 특히나 영화 아저씨 이후 한국식 느와르의 서로 총칼을 겨누는 잔인한 영화들이 더이상 보기 싫었다. 그럼에도 남자들의 탈주극을 그린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구교환 배우가 출연한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개연성이 좀 떨어지고 왜 탈주를 감행해서 남한으로 오려하는 주인공 규남의 서사가 없어서 주인공에게 몰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 러닝타임(94분)이 짧았음에도 재미는 덜했다. 그런데 구교환 배우의 북한군 병사 리현상이 피아니스트 였다는 점이 꽤 매력있게 다가왔다.
리현상은 러시아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그는 자신이 가려는 피아니스트의 길을 가지 못했다. 영화 탈주에서 리현상(배우 구교환)은 하고자 하는 걸 이루지 못하고 북한에 남는 인물이다. 그가 러시아에서 피아노 건반으로 음악을 연주해온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총을 잡는다. 이 악랄하고 못된 악당이 현실에 적응하고 타협하며 사는 안쓰러운 사람으로 보이는 건 나뿐일까.
그에 반해 주인공 규남(배우 이제훈)은 북한에서 주어진 현실을 탈주하려고 노력하는 인물.
주인공이 남한을 향해 전력질주 하는 규남을 끌어당겨 앉히고 싶은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마음이지 않을까 싶고 그러다가도 규남을 응원하는 쪽으로 서 있곤 했다.
현상은 자신과는 다르게 꿈을 품고 한발자국씩 나아가는 규남을 보며 무언가를 꿈꾸지 못하는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규남을 끝까지 쫓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추격전이 어설프지만 아픈 마음을 갖게끔 유도하는 이 영화가 머릿속으로 남게 만드는 이유는 빠른 액션과 영화적 장치들이 아니였다. 내겐 리현상이 들려주는 영화 속 음악 한 부분이였다.
리현상이 파티 무대에서 피아노로 치는 곡은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작품번호 23번 이다. 러시아에서 피아노 전공을 했을 테니 라흐마니노프 곡을 선곡했을 가능성은 사실 제일 높기도 하다. 그렇지만 라흐의 곡과 구교환배우의 싱크로율은 완벽하게 그려진다. 서로가 어울리는 장면과 음악이었던 것 같고.
실제로 극중에서 리현상은 선우민(배우 송강) 과도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리현상에게 오랫만에 곡을 쳐달라는 주문을 한다. 그의 부추김에 어쩔 수 없이 피아노 앞에 오래만에 앉은 리현상은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피아노의 소리로 담는다. 피아노의 손가락에서 병사로서의 손가락이 라흐마니노프의 거친 타건에 묻어난다. 너무 어울린다.
실제로 이곡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고통속에 있을 때 작곡해서 직접 연주한 곡이기도 하다.
이는 라흐마니노프가 실제로 자신의 사촌동생(고모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고 부부가 되기까지 고통의 나날들을 보낸 부분과 리현상의 고통이 겹쳐보인다.
라흐마니노프의 또 다른 곡이 등장하는데 제일 유명한 협주곡 2번이다. 1901년에 작곡된 곡으로 대표곡이라 피아니스트들에게 자주연주되곤 한다. 이 곡은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된 곡인데, 교향곡 1번이 실패하고 정신적 충격에 있던 라흐마니노프가 이 의사에게 치료받아서 회복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행히 협주곡의 성공으로 그는 다시 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많은 피아니스트 중에 코로나시기에 무관중으로 연주했던 선우예권의 곡을 제일 즐겨 듣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옛날 곡을 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