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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이 May 29. 2021

그것들을 위한 축포

회자정리 거자필반

얼마 전 부모님과 외할머니 댁에 갔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서 조금 더 들어가 포도 농사가 주를 이루는 리 단위 마을, 차도 사람도 얼마 없는 초록의 시골에서 나의 엄마가 자랐다.

외할머니는 몇 해 전 60여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을 먼저 보냈다. 이 마을에서 6남매를 낳고 먹이고 키운 외할머니는 큰 키에 단단한 몸으로, 움직여야 사시는 분이었다. 겨울을 제외한 계절이면 외삼촌의 농사일을 거들기도 하면서 머위며 고사리, 쑥 등을 캐고 다니시던 외할머니에게 작년 겨울에 병이 생겼다. 자꾸 손톱 밑에서 희끄무레한 것들이 자란다고 했다. 본인 손톱 밑에서 굼벵이들처럼 자라나는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 계속해서 손톱을 파내었다. 피가 날 정도로.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란 외삼촌은 병원은 물론, 가족들에게 외할머니의 좋지 않은 상황을 알렸다. 그 이후 엄마는 격주로 2시간 거리의 외할머니 댁을 찾고 있다.   

  

4년 전 나의 외할아버지는 그게 언제든 이제 나는 가보련다, 떠나셔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었다. 인간이 에너지를 얻고 활동하기 위해 섭취해야 하는 열량의 대부분을 술로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만 넘어간다고 하셨다. 자신의 입으로 저작 운동을 할 기력도 없으셨다. 그해 추석은 외할아버지와 함께하는 마지막 추석임이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일상의 파이가 학업과 친구들로 채워진 이후로 잘 뵙지 못했던 외할아버지는 나의 얼굴도 가물가물해하셨다. 하지만 노쇠한 목소리로 날 부르는 발음은 정확했고, 일어서려 나의 손에 자신의 몸을 지탱하실 때 느껴지는 힘은 그래도 한 해 정도는 더 버티실까 기대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다음 해 추석이 오기 훨씬 전, 나는 차게 누워계신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만지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했다.      


마지막, 이라는 것은 웬만해서는 내 마음을 가만두지 않는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았지만, 자주 찾아뵙지도 못해 그의 마지막 앞에서는 죄송스러움만 더해갔다. 나의 외조부모는 손수 농사지은 감으로 조물조물 말랑거리는 곶감을 만들며 초록이 짙은 그 마을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인 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을 맞이하는 마음의 준비가 완전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었고, 삶 속에서 들이닥치는 후회에 저 멀리서 아려오는 마음만 찬찬히 바라본다.    

  

짙은 마지막은 무의식에 박혀 나의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네 감정받아주는 것도 힘들고,

전에 만나던 사람과 한참 우리 사이를 되돌아보는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그 사람이 흘리듯 한 말이었는데, 나에게 전하던 그 많은 말 중에서 작게 읊조려 그 대화에서 주요한 내용이 아니었음에도 저 말이 내 마음에서 유독 밟혀 오랫동안 버석거리고 까끌까끌한 굵은 모래알 같았다. 물론, 앞 뒤 사정 모두 헤아려 나는 나를 항변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지워가는 마지막까지도 남아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이유라 하자면 나는 유난히 헤어짐이라는 상황에 몰입하면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헤어짐과 마지막은 항상 두려웠다.

8살 때 엄마가 막냇동생을 낳으러 몇 주간을 나를 떠났을 때도, 학창 시절 학년이 바뀌어 친구들과 이제는 영영 같은 교실에 있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누군가와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때 그 연의 마지막이 다가올까 봐, 이론적인 수명만 비교해 보았을 때 분명 나에게 먼저 헤어짐을 고할 것이 뻔한 반려동물들은 쉬이 키울 생각도 하지 못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사랑하던 것들과의 마지막이지만, 간혹 그렇게 끝나기를 바라던 것들과의 마지막도 의외의 슬픔을 가져올 때가 있으니 말이다.


한껏 슬퍼하고 나면 시원스레 털어낼 때도 많아, 나는 이것이 내가 잔정이 많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그 당시 그 무언가와 그 누군가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나에게 쏟아내는 회한의 감정이 대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그래서 나는 이제 이런 사자성어, 노래 가사들처럼 말하고 꽤 쉬이 받아들이며 현재로 돌아와 잘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떠한 마지막에는 후회와 미련이 안 남을 수 없을지라도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를 위해 현재 나의 사람들과 나의 일 혹은 언젠가 함께 할지도 모르는 나의 반려동물과 맞이할 마지막을 위한(슬퍼하지 않을 자신은 절대 없지만, 내 방식의 정리가 끝난다면) 축포를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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