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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희 Jan 16. 2020

'춘광사설', 달빛이 주인장의 마음을 말해주는 곳

나의 레슬리 ep23 : 후암동 "춘광사설"의 주인장, 서율 님의 레슬리

<당신의 레슬리>를 시리즈로 만들어 엮기로 하고 첫 글을 발행한 것은 지난 달이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내 서랍에는 그 자신만의 레슬리를 그려가는 사람과 공간에 대한 글이 하나 있었다.

바로 후암동에 위치한 '춘광사설'과 그 주인장에 대한 글이었는데, 그 글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 주인장과 한 번쯤 길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인에 말에 의하면 '이상한 대목에서 낯을 가리는' 내 성격 덕분에 '춘광사설'에 가더라도 그에게 먼저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지인이 대신 판을 깔아주었는데도 부끄러워하느라 그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웃기만 했었다.


그래서 <당신의 레슬리>를 시작한 후, 나는 묵혀두었던 글에 주인장을 직접 만난 이야기까지 덧붙여서 발행해야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의 첫 삽을 뜨기도 전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주인장이 곧 '춘광사설'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마치 귓가에 "12시가 되며느은, 문을 닫는다"라는 노래가 쟁쟁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이상한 용기가 생겨난 나는 '춘광사설'의 주인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떠날 날을 정해둔 상황에서의 인터뷰 요청이라 정중한 거절의 답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상과 달리, 감사하게도 주인장은 흔쾌히 내 제안에 응해주었다. 그래서 바람이 매우 차던 1월의 어느 오후, 나는 다시 후암동의 그 골목을 찾았다.


늘 어둑한 시간에 찾았던 곳을 환한 낮에 가니 무척 새로웠다. 빨간 등이 켜지지 않은 '춘광사설'의 한자 간판은, 마치 화장을 지운 맨 얼굴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환한 낮에 마주하고 앉은 주인장의 산뜻한 얼굴도 새로웠다. 그제서야 알았다. 내가 그동안 주로 보았던 그의 얼굴은 어두운 시간의 옆모습이었다는 것을.



追가 흐르던 어느 봄 밤의 '춘광사설'. 이렇게 쓰게 될 줄 몰랐던 영상이지만.. 스치듯 주인장의 옆모습이 보인다.



"어느새 '춘광사설'이 문을 연지 4년이 되어가는데,

시간이 갈수록 '춘광사설'만 남고 저는 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길 바라는 저의 자아를 위해 내린 결정이에요."



아시다시피 '춘광사설'은 이미 팬들에게 꽤 유명한 곳이다. 장국영의 이름이 붙은 토마토 라면과 칵테일을 맛보며, 그의 노래까지 청해 들을 수 있는 귀한 공간. 이런 공간이 서울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는데, 어느새 이별이라니. 그래서 나는 그에게 염치불문 다짜고짜 이별의 이유부터 먼저 물었다.


그런데 답으로 돌아온 말이 뜻밖이면서도, 또 한 편으론 그 의미를 단박에 이해해버렸다.

주인장은 이곳을 운영하는 4년간 손님이 있던 없던 늘 끊이지 않도록 초를 켜 두고, 생화를 준비하고, 쓸쓸한 노래를 걸어두고 누군가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곳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은 미련하다 싶은 방법으로 운영을 해나가다 보니 알게 모르게 생채기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공간은 남지만,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유쾌한 청년 서율은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마음은, 마치 떠나버린 보영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아휘의 그것과 같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아휘가 마침내 보영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났 듯, 주인장 역시 이별을 준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춘광사설>이라는 영화의 스토리와 이미지를 모티브로 삼은 공간, 그리고 거기에 장국영이라는 인물이 덧입혀진 공간. 쓸쓸한 영화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사람의 조합이라서, 어쩌면 이곳은 태생적으로 쓸쓸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거기에 주인장이 섬세하고도 예민하게 다듬어간 색채와 공기는 이곳을 한층 더 '춘광사설'답게 만들었다. 그저 별 뜻 없이 지나쳤던 것들이 사실은 모두 주인장의 의도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늦게 감탄하게 된다. 그래, 제 아무리 팬이라지만 이곳에서 <무심수면>이나 <Miss you much>가 흘러나왔다면 영 어색했을 것이다.


그리고 홍콩의 음식들을 주인장 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메뉴들은 '춘광사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홍콩의 길바닥에서 서성이거나 주저앉아 먹던 음식들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구나 싶어 놀라우면서도 반가웠었다.

사실 이 곳을 처음 알았을 때에는 '어디 가져다 댈 것이 없어서 장국영을 라면에 가져다 대냐'고 살짝 분노했던 나지만, 이제는 매콤한가 싶으면 새콤하고 새콤한가 싶으면 앙칼지게 매콤한 이 라면을 달리 뭐라 부르겠나 싶기도 하다.

온갖 문화가 뒤엉켜있어 더욱 매력적인 홍콩과 영화 <춘광사설>, 그리고 장국영. 어쩌면 이곳은 이 세 개의 코드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레슬리의 생일에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먹었던 '장국영' 토마토 라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단골 분들의 힘이 컸어요.

제가 좀 지친다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마치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오랜 단골들이 와서 에너지를 주고 가셨어요.

사실 찾아오기 편안한 곳은 아닌데, 늘 아껴주셨던 분들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주인장의 말마따나 '양조위의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곳은 장국영에 대한 편애로 가득 차 있다. 처음 이 공간을 계획할 때는 주인장이 집에서 가져왔던 장국영의 낡은 앨범들이 전부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레슬리의 팬들이 선물한 사진들과 그들이 남기고 간 마음들이 쌓여 '춘광사설'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원래도 팬이었지만, 주인장은 '춘광사설'을 운영하면서 더욱더 장국영의 팬이 된 것 같다는 고백 아닌 고백을 해왔다.

사실 팬들 사이에서는 주인장을 두고 "왕가위 팬이다", "장국영 팬이다"로 의견이 갈렸던 것 같지만, 인터뷰를 하며 지켜본 그는 레슬리의 팬이 맞았다.


내가 주문한 밀크티를 끓여내며 장국영의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고, 레슬리를 이야기하며 애틋한 얼굴을 하는 그가 팬이 아니라면 누가 팬이겠는가.

비록 그에게 무슨 노래를 제일 좋아하느냐, 어떻게 입덕 했느냐 하는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을  묻고 답해야 팬인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한때 라면에 레슬리의 이름을 붙였다고 주인장을 내심 흉보았던 나는, 이제는 안다. 내가 글로서 '나의 레슬리'를 표현한 것처럼, 주인장은 토마토를 넣은 라면과 칵테일, 그리고 이 작은 공간으로 '그의 레슬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남산 밑의 홍콩을 찾으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얼굴



"사실, 가장 걱정되고 마음이 아픈 것은

장국영의 이미지를 소구하고 떠나는 사람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주인장이 그 말을 꺼내는데, 마침 공간 가득 레슬리가 콘서트에서 불렀던 <月亮代表我的心(달빛이 내 마음을 말해주네요)>이 울려 퍼졌다. 마치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레슬리가 보내온 화답 같았다. 결국 주인장은 이 노래의 첫 소절을 채 듣지도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그가 걱정하듯 그가 그저 장국영이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소구만 한 것이라면, 과연 그 많은 팬들이 '춘광사설'을 오래도록 다시 찾았을까. 더군다나 한 번 간 곳은 다시 찾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은 요즘 세상에.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문득 <고별 연창회>에서 마이크를 내려놓고 무대를 떠나기 직전의 레슬리를 떠올렸다. 이별이 눈 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의 안타깝고 아쉬운 눈물.

그 이야기를 건네니 주인장은 빨개진 눈으로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리곤 스스로 공식적인 마지막 영업일로 정해놓은 1월 31일이 다가오는 것이 잘 실감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는 왠지 주인장 만의 '고별 연창회' 마지막 무대를 함께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토마토 라면을 청해서 먹고 나오는 길에, 1월 31일 밤에 다시 찾겠노라 예약을 걸어두었다.

주인장도 '춘광사설'도 아직은 거취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다음을 기약하지 않은 이별이라 더 애틋함을 알기에 그 마지막을 함께 할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 

꿈꾸는대로 더 많은 것을 경험한 주인장이

'춘광사설'과는 또 다른, 새로운 공간과 함께 돌아온다면 다시 반갑게 맞아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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