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정전, 동사서독 - 왕가위 영화 속의 장국영

나의 레슬리 ep26 : 내가 사랑한 배우 장국영 (4)

by 장지희

여러분은 장국영의 영화 중에서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시는지.

내 경우는 이론의 여지없이 <아비정전>이다.


그의 영화들을 보다 보면 '아, 저건 극 중 인물이 아니라 레슬리 같아'라는 마음이 드는 장면들이 있는데, <아비정전>엔 그런 장면들이 유독 많다. 어쩌면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유모의 손에서 자란 주인공 旭仔(욕자이)와 장국영의 개인사가 매우 흡사하다고 여기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아비정전의 주인공 이름은 '아비'가 아니라 '旭仔/욱재'다. 제목 자체가 워낙 유명해져서 '아비'가 주인공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장국영을 旭仔라고 부른다. 사실 阿飛는 '반항아, 망나니, 건달, 부랑아' 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阿飛正傳>을 한글로 번역하자면 <망나니 이야기> 정도가 된다. 하지만 편의를 위해 아래 본문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을 알려진 대로 '아비'라 칭한다.)



나는 홍콩을 가면 그가 출연했던 작품의 촬영지에 가보곤 한다. 음악은 대개 장소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영화는 매 장면을 촬영한 장소가 기록되고 기억되기에.

이것은 내게 홍콩 여행의 의식과도 같은 것인데, 가봐야 얻을 것이 별로 없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매번 이미 영화 속과는 딴판이 된 홍콩의 거리를 뒤지며 그때 그 장면은 이쯤이었을까, 아니면 저쯤이었을까 가늠해보곤 한다.

그리고 이 의식에 가장 많이 소환된 작품은, 당연히 최애 작품인 <아비정전>이다.


IMG_9832.PNG 미니홈피에서 겨우 찾아낸 2003년 가을 '퀸즈 카페'의 사진. 엄청나게 찍었던 그때 그 사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비정전>은 1960 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촬영 당시에도 허름한 장소들을 찾아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덕분에 촬영지 중에서 지금도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장국영이 여자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던 집은 주차장 건물로 탈바꿈한 지 오래고, 유가령과 장학우와 만나 밥을 먹었던 레스토랑 <Queen’s Cafe>는 수년 전에 폐점을 했다가 다시 오픈을 하기는 했지만 본래의 러시아식 음식 대신에 복고풍 인테리어를 가진 체인점이 되어 버렸다.


17년 전에 갔을 때만 해도 한쪽 벽에 <아비정전>의 포스터가 커다랗게 걸려있고, 그 자리가 바로 아비의 일행이 영화 속에서 식사를 했던 자리였다고 자랑하던 지배인을 만날 수 있었는데 말이다. 한여름에 때아닌 감기에 걸려 골골대며 도착해 영화 속에서 장국영이 앉았었다는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입천장이 홀랑 데도록 뜨거운 러시아식 수프를 홀짝홀짝 들이켰던 기억이 지금도 이렇게 생생한데.



15.jpg 아마 여기가 촬영 당시의 'Seymour Terrace' 아니었을까 싶다.


아비의 집은 또 어떤가. 'Seymour Terrace'라는 건물 이름 하나 달랑 들고 찾아간 그곳은 주차장 겸 주상복합 건물이 되어 있었다. 사라진 과거의 건물 이름으로 위치를 찾다 보니 구글맵과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여긴가? 저긴가? 한참을 헤매며 근방을 몇 바퀴나 돌았는데, 1시간 만에서야 깨달았다. 내가 이 길을 뒤지는데 랜드마크로 삼았던 건물이 내가 찾던 바로 그곳이라는 것을. 허탈한 마음으로 건물을 둘러보는데, 마침 건물의 1 층에는 웰컴 슈퍼가 있었다. 날이 더워 뭐라도 마셔볼까 하는 마음으로 쓱 들어갔는데 어머나 매장에는 <아비정전>에 흘렀던 <Maria Elena>가 흐르고 있었다. 장국영이 난닝구 바람으로 맘보춤을 추었던 바로 그 노래 말이다.


반가웠다. 아비의 흔적을 찾아 이 곳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이 노래를 주기적으로 틀어주는 건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데 순간 음악이 뚝 끊기며 와다다다 광동어가 들려온다. 아, 매장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은 것이었다. 여행 중에 선물처럼 나타나는 너무나도 절묘한 순간, 덕분에 잠시나마 대차게 오해를 해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그 순간을 <아비정전>의 오랜 팬에게 찾아온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12.jpg 60년대 오렌지족쯤 되었으려나. 포마드를 바른 2:8 가르마로도 멋져 보이다니, 반칙이다.


하지만 반대로 아비에게 실연당한 소여진(장만옥)이 경찰관(유덕화)과 만났던 공중전화 박스는 나에게 사고를 안겨줄 뻔했다. 비 오는 밤 두 남녀가 만났던 영화 속 그 골목을 직접 걸어보고 싶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간 다음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는 고급 아파트 사이를 얼마간 걷고 나니 문제의 그 골목이 모습을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장만옥이 버스를 기다리던 자리에 잠시 앉았다가 영화 속에서 나오는 돌담길을 따라 공중전화부스가 놓여있던 자리까지 그대로 내려갔다. 공중전화부스가 있던 자리는 길의 끝자락이었고, 그 자리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짧은 굴다리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뭐가 나올까 싶어서 굴다리 쪽으로 몸을 트는데... 세상에 맞은편에서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빠앙-!

신경질적인 클락션 소리와 함께 소형 밴이 나를 간발의 차로 스치고 지나갔다. 영화 속 공중전화부스가 촬영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것이라는 사실 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도가 아닌 차도였을 줄이야. 차선 조차 그려지지 않은 일방통행의 좁은 길이었기에 동네 산책로쯤 된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오산이었다. 나도 운전자도 서로를 일찍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홍콩에서 객사할 뻔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친 곳도 없었고 영화 속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일한 장소를 찾았다는데서 위안을 삼았다.




사실 고백하자면 <아비정전>이 처음부터 최애 영화는 아니었다. 실제로는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아서 오래도록 묵혔다가 본 영화였다.

개봉 당시 중학생 이상 관람가였기 때문에 턱걸이일지언정 극장에 입장할 수 있었지만, 홍콩 느와르를 기대하고 영화를 보던 관객들이 영화에 불만을 품고 극장을 때려 부순 ‘중앙극장 사건’을 신문으로 읽고 나니 당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수년을 보지 않고 묵히다가 <중경삼림>을 극장에서 본 뒤에야, 이 감독의 영화 속 장국영은 어떨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 <아비정전>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왔다. <아비정전>은 찾는 사람이 없는지 비디오 대여점의 홍콩영화 코너 가장 구석에 처박혀있었다. 그래도 주연배우 명색이 장국영이요 유덕화인데 너무한다 싶었지만 대여 장부를 홀끗 건너다보니 출시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대여 기록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짧았다.


별 기대 없이 재생 버튼을 누르고 자리를 잡자, 이내 푸르고 어두운 화면에서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의 바람둥이 아비가 나타났다. 극 중의 소여진이 1분만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아비의 작업에 홀랑 넘어가버린 것처럼 나 역시 그런 아비에게 홀랑 빠져버렸다.

당시의 내 기준으로 <아비정전>은 장국영의 영화 중에서는 처음 만나는 유형의 영화였다. 그는 총도 들지 않았고 제대로 된 사랑도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멋있지도 않았다. 멋지기는커녕 사랑에 대한 꿈이 많았던 여고생의 시점으로 보자면 아비는 ‘천하의 개자식’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이상하게도 아비가 지금까지 보았던 장국영 중에서 가장 실제 장국영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헐렁한 반바지 차림으로 슬리퍼를 무심하게 슥슥 끌면서 걷고, 고개를 살짝 숙인 얼짱각도로 거울을 올려다보며 머리를 빗어 올리는 모습이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상대에게 못되게 굴면서도 본인이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 사랑했던 여자가 드러내 보인 진심에 아픈 눈을 했다가도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야멸찬 얼굴로 돌변하는 아비를 볼 때마다 왠지 진짜 장국영을 살짝 엿본 것 같았다.


나는 장국영의 특징과 매력을 가장 잘 캐치해낸 사람이 왕가위라고 생각한다. 그가 연기한 왕가위 영화 속의 인물을 들여다보면 모두들 연약한가 싶지만 탄탄하고, 강한 것 같지만 세상 둘도 없이 여린 캐릭터들이다. 아비가 그렇고, 동사 역시 그렇고, 하보영 또한 그러하다. 내가 왕가위 영화 속의 장국영을 가장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동사서독>은 <아비정전>만큼이나 좋아하는 작품이다. 비록 러닝타임이 너무 길고 등장인물도 많은 데다 극 중 배경인 사막이 주는 먹먹함 때문에 <아비정전>만큼 즐겨보게 되지는 않지만.



16.jpeg 어쩐지 '아비'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동사'



<동사사독>은 잘 알려진 대로 홍콩의 걸출한 무협작가 김용이 쓴 <사조영웅전>의 모티브로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협객인 동사(동쪽의 사악한 놈), 서독(서쪽의 독), 남제(남방의 황제), 북개(북방의 거지)가 화산논검대회에서 무협 실력을 겨룬다는 원작에서 인물만 가지고 온 작품이다. 혹자는 프리퀄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물만 가져다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쓴 스핀오프에 가까워 보인다.


장국영은 처음 동사서독 중 동사인 황약사를 연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아는 <동사서독> 중에서 양가휘가 연기한 ‘취생몽사’를 마시고 기억을 잃는 역할이다. 하지만 몇 년에 걸친 촬영이 끝나고 나자 그는 난데없이 서독 구양봉이 되어 있었다.


동사서독의 촬영이 길어지자 성난 제작자들을 달래기 위해 왕가위와 유진위는 <동사서독> 속의 캐스트를 그대로 활용해서 <동성서취>라는 신년용 코미디 영화를 급조해낸다. 장국영이 동사였던 시절에 촬영을 했던 작품이라, <동성서취>에서는 장국영이 동사, 양조위가 서독, 양가휘가 남제, 장학우가 북개를 연기한다. <동사서독>에서는 남제의 캐릭터는 사라져 버리지만 장학우 만은 두 작품 모두 '북개' 홍칠공으로 등장한다.



원작의 서독, 구양봉은 아주 질이 나쁜 인간이다. 양봉업자 같은 이름에 영화 속 장만옥과의 애틋한 사랑을 기억한다면 원작의 캐릭터에 홀딱 깰지도 모른다.

원작의 구양봉은 자신이 거처하는 백타산 근처에는 독사를 풀어놓는 악당이며, 시종일관 살뜰하게 거두는 조카 구양극은 사실 형수와 내통해 낳은 아들이라는 패륜을 저지른 인물이다. 그리고 무림고수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는 화산논검대회 내내 치졸한 배신과 배반을 일삼으며 고수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인물 또한 서독이다.

서독의 毒은 그가 온갖 종류의 독을 장난감보다도 잘 다룬다는데 서 생겨난 이름이지만, 인물 그 자체도 독이라는 단어와 찰떡같이 어울린다. 동사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괴팍해졌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서독은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이' 나쁜 놈이다.


그런데 왕가위는 이런 인간말종 캐릭터에 서사를 입힌다. 형수와의 불륜은 타이밍이 어긋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애절한 로맨스가 되고,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그를 스쳐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그가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분명히 다른 인물이지만 영화 속 구양봉은 마치 아비의 전생을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킨다.


16.png 쨍하게 맑은 하늘이 어쩐지 서글펐던 <해피투게더>의 한 장면


감독 왕가위와 배우 장국영의 케미스트리는 매우 특별하다. 왕가위의 또 다른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양조위와는 색이 다르다. 감독 왕가위는 분명 배우 장국영에 매료되어있던 것이 분명하고, 배우 장국영은 감독 왕가위의 작품에서 살아 움직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 왕가위와 인간 장국영의 케미스트리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해피투게더>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주연으로 알고 아르헨티나로 떠났지만, 한 달 넘게 현지에서 체류했음에도 결국 조연이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이질에 걸려 고생을 하면서도 내내 촬영을 기다렸던 장국영을 왕가위는 촬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장국영이 과월 콘서트를 앞두고 있어 홍콩으로 돌아갈 날짜가 정해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왕가위의 작품은 대본이 없어서 배우들조차도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컴백 콘서트를 앞둔 상황에서 남미로 날아가 정확히 어떤 내용일지도 모를 영화에 출연할 결심을 했다는 것은 장국영으로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만약 예정대로 촬영이 착착 진행이 되었더라면 <해피투게더>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 같다. 원래 플롯 상에는 하보영에게 또 다른 연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그 역할을 맡았던 홍콩 가수 관숙이는 아예 통편집을 당했다. 그리고 장국영이 곱게 여장을 하고 촬영한 장면도 빛을 보지 못했다.


<해피투게더>라는 제목과는 달리 영화는 모두가 행복하지도 함께 있지도 않은 결말을 보여주는데, 만약 촬영이 좀 다르게 전개되었다면 이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왕가위가 지금이라도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주면 안 될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국영은 <해피투게더> 이후로 왕가위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떤 영화를 보아도 아비가 생각나게 하는 인물이 하나쯤은 등장하는 왕가위의 영화에서 아비의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마도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요즘의 왕가위 역시 왠지 삼각형으로 변해버린 사각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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