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슬리 ep37 : 그 남자 작사, 그 남자 작곡 (3)
장장 4편에 걸친 홍콩 방랑기를 마무리하고, 몇 주째 이어오는 '그 남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노래들을 다시 꺼내보려고 한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작곡가 장국영의 작품들을 모아보았다.
사실 작곡 장국영, 이라는 글자 앞에서 내가 늘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영화 <금지옥엽> 속 인기 작곡가 샘이 피아노를 치며 즉석에서 <追>를 부르는 장면이다. 실제로 레슬리는 피아노를 잘 치지 못했다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작곡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늘 그 그랜드 피아노가 떠오른다.
그런데 피아노 옆에 원영의가 함께 앉아있던 <금지옥엽> 속의 그 장면을 떠올리며 선곡을 해서일까. 무심코 글을 다 완성하고 보니, 공교롭게도 여자 가수들에게 준 곡들만 모였다. 물론 실제로 이 노래들을 부른 그녀들과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아 작곡을 하진 않았겠지만, 80년대와 90년대의 홍콩 음악계를 수놓았던 여자 스타들이 불러낸 레슬리의 곡은 과연 어떤 곡들일지 함께 들어보자.
https://v.youku.com/v_show/id_XMTMxMzU4NTg2NA==.html
레슬리의 대표적인 듀엣곡 중 하나인 <Miracle>을 불렀던 여가수 맥결문(麥潔文 / Connie Mak). 그녀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같은 음반사에 소속되어있던 인연으로 그와 듀엣을 부르고 86년 콘서트에는 초대손님으로도 등장하기도 한 바 있다. 데뷔는 레슬리가 좀 더 빨랐지만, 나이로는 맥결문이 2살 누나이다.
그런데 레슬리가 그녀에게 자작곡을 선물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무려 1989년의 일이었다고. <一晚 (하룻밤)>이라는 제목의 이 곡은 어딘가 모르게 비장한 느낌이 드는 도입부와 달리 애틋한 감성의 발라드이다.
사실 전후 사정을 알고 들었으니 그런가 보다 하지, 노래만 들었다면 레슬리가 만들었다는 상상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가진 곡이다. 일전에 소개한 황익도 그렇고 레슬리가 작곡 초기에는 여러 장르들을 시도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유명한 작가의 습작을 들춰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노래를 몇 번 반복해서 듣다 보니, 다른 건 몰라도 레슬리가 이 곡을 왜 맥결문에게 주었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내가 아는 홍콩 여가수들의 목소리들을 하나씩 대입해봐도 적당한 적임자가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맥결문이 이 노래의 감성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적임 자였나 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S_aJ1j93AA
사실 레슬리가 직접 부른 자작곡 이외에, 내가 제일 처음 들었던 레슬리 작곡의 노래는 아마도 이 곡일 것이다. 여명이 부른 <一生最愛(일생 최고의 사랑)>과 어느 쪽이 먼저인지 늘 헷갈리지만.
레슬리가 작곡한 노래를 듣겠다고 잘 모르는 여자 가수의 앨범을 구입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인트로를 들었을 때의 그 감정이 지금도 선명하다. '作曲 : 張國榮'이라는 익숙한 글자의 낯선 조합이 주었던 새삼스러운 전율도.
주혜민은 영화 <시티보이즈(원제 : 藍江傳之反飛組風雲 / 남강전지반비조풍운/ 이하 '남강전')>에서 상대역을 맡았던 당시 홍콩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가수 겸 배우였다. <남강전>은 홍콩의 유명 형사였던 '남강'의 이야기를 극화한 작품이다. 레슬리가 맡은 역할은 남강이 아니라, 그와 여러 인연으로 얽히게 되는 반항아 역할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동안이라고 해도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연기하기는 다소 버거운 역할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장년의 남강을 연기할 수도 없었겠지만.
레슬리는 이 작품에서 함께 연기하면서 주혜민에게 이 곡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단 한 번 함께 연기한 인연 치고는 의외다 싶을 수도 있지만, 유튜브에 주혜민이 은퇴를 앞둔 레슬리를 인터뷰했던 영상이 종종 보이는 것을 보면 꽤 오랜 인연인 듯 하다.
재미있는 점은 주혜민은 굉장히 의외의 측면에서 레슬리와 공통점을 가진 스타라는 것이다. 전성기 시절, 홍콩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녀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며 97년을 즈음하여 연예계 생활을 청산하고 남자 친구와 함께 캐나다로 이주했다. 그리고 캐나다 오타와에서 그림에 심취하며 평범한 삶을 살던 그녀는 결국 2003년 홍콩과 연계계로 돌아오게 된다. 평범한 삶을 찾아 캐나다로 떠났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과정이 레슬리와 꽤 비슷하다.
그리고 멜로디가 섬세하고도 슬픈 이 곡은, 2002년에 황요명이 레슬리와의 콜라보 앨범에서 리메이크한 바 있다. 황요명이 평소에도 좋아하던 곡이었다고. 당시에 꽤나 의외의 선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목소리로 듣는 이 곡의 느낌도 퍽 좋아서 언젠가 레슬리 버전으로도 꼭 들어보고 싶은 노래였는데... 가사 없이 흥얼거리는 것이라도 좋으니, 어디 작곡가 버전 데모라도 있으면 출시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eV2Fa1knvk
레슬리는 평소 마작 마니아로 유명하다. 유가령, 왕비와 둘러앉아 마작을 하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워서,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온다면 그날엔 이들과 마작을 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언젠가 토크쇼에 나와서 그녀들과 마작을 할 때의 이야기를 하던 레슬리는 유독 신나 보였다. 유가령이 왕비가 마작하는 것을 보며 "왜 이렇게 못하냐” 고 타박을 하자, "내가 노래를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마작을 못한다고 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다"고 분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웃었던지.
그래서 나도 레슬리처럼 마작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불타 올랐던 때가 있었다. (사실은 레슬리의 준비된 마작 친구 후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넷 게임사이트에서 마작 게임이라는 것을 골라 한동안 꽤 심취해있었는데, 세상에나. 알고 보니 마작이 아니라 마작의 탈을 쓴 '사천성 게임'이었다.
레슬리는 절친한 마작 멤버인 왕비에게도 곡을 하나 주었다. 영화 <백발마녀전2>의 주제곡인 <忘掉你像忘掉我(당신을 잊는 것은 나를 잊는 것과 같아요)>이다. 왕비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가 비극적으로 이루어진 탁일항과 연예상의 사랑만큼이나 애틋하다. 게다가 "당신을 잊는 것은 나를 잊는 것과 같다"니, 가사 또한 심금을 울린다.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보다 훨씬 더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표현에 늘 감탄하게 된다.
이 곡은 왕비의 정규앨범이 아닌 베스트 앨범에만 수록되어 있다. <最菲(최비)>라는 앨범의 마지막 타이틀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 곡을 소장하겠다며 홍콩 HMV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CD장을 정리하다가 이 앨범을 다시 꺼내보게 되었는데, 한동안 꺼내 듣지 않고 고이 모셔만 두었는데도 커버가 조금 바래져있었다.
매일매일 열심히 꺼내어 듣던, 한동안 듣지 않고 잘 모셔두었던 간에 어쨌든 모든 것은 시간에 흐름에 따라 낡아가는구나. 고이고이 레슬리를 기억하고 추억하고 그리는 내 마음도 꼭 그 음반처럼 낡아가고 있겠구나 싶어서 조금은 슬펐다.
<나의 레슬리>를 쓰다보니 무척 열심히 레슬리를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 그를 반짝 기억했다가 다시 잊어버리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쓴 바 있었는데...
언젠가 이 글을 멈추게 되면, 나 역시 그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흐릿해져 버리진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더불어 언제까지 이 글을 쓸 수 있을까, 멈추게 된다면 어떠한 모습으로 멈추어야 할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