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슬리 ep40
서른 살이 되면 흔히 “계란 한 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계란이 서른 알 들어가는 판 하나를 꽉 채운 나이라는 의미이다. 나는 우리 나이로 서른 살이 되던 해, 친구에게 정말로 '계란 한 판'을 선물 받았다.
당시 일하던 회사 앞으로 차를 몰고 온 친구는 나에게 삶은 계란 30알이 들어있는 계란판을 투척하듯이 던지고는 바쁘다며 휘리릭 사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 유명한 “오다 주웠다”였다. 멍하니 저만치 사라지는 친구의 차를 보다가 손에 들린 계란판을 내려다보았다. 곱게 삶은 계란 한 알 한 알에 붙여진 글자를 읽어보니 "Happy 30th Birthday Monica!"였다. 아 심쿵, 세상 심쿵.
당시에 다니던 곳은 직원이 스무명 남짓 되는 작은 회사였다. 야근이 확정되어있던 날이라 포장을 풀어 동료들과 계란을 나눠 먹었다. 전 직원에게 한 알씩 다 돌리고도 꽤 넉넉히 남은 계란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참 어린 나이지만. 어쨌든 덕분에 그 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지금도 나의 서른은 핑크색 리본으로 묶은 계란 한 판으로 상징되곤 한다. 2006년의 일이었다.
그보다 앞선 2005년의 홍콩, 여기에도 서른을 앞둔 여자가 있다. 일에 전력한 덕분에 어린 나이에 매니저로 승진했지만, 그녀는 사실 연인과도 가족과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게다가 집주인은 갑자기 집을 좋은 조건에 팔았다며 한 달 안에 집을 비우라는 축객령을 내린다.
결국 번아웃이 온 그녀는 인정받고 있는 직장을 그만둔다. 그리고 유럽으로 긴 여행을 떠난 집주인 조카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집에 도착해, 집안을 찬찬히 둘러보는 그녀. 비디오 플레이어에 꽂힌 테이프에 "Play Me"라는 메모가 눈에 띈다. 시키는 대로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했더니 화면 속에 '리틀 이영자'라고 해도 믿을 법한 귀여운 여자가 나타나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한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 너무 흥분돼요.
이유를 말해줄까요? 오늘 밤에 여행을 가거든요!
어디로 여행 가게요?
혹시 <由零開始(유령개시)>라는 노래 알아요?
<日落巴黎(일락파리)>는요?
이 사람 기억나요?
맞아요! 오늘 밤 파리로 떠나요!"
그랬다. 집주인의 조카는 레슬리의 팬이었다. 동시에 <일락파리>의 팬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키우는 거북이 두 마리의 이름도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매기(장만옥의 영어 이름)'와 '체리(종초홍의 영어 이름)'다.
어릴 때부터 <일락파리>를 보면서 "레슬리처럼 바게트 빵을 들고 파리의 거리를 걷고 싶었다"는 집주인 조카는 <Stand Up> LP를 한 번에 세 장이나 지르고, 홍함 체육관 앞에 가서 셀프 카메라를 찍고, 레슬리가 등장한 영상을 열심히 비디오테이프로 녹화해서 보관하는 덕후다. 하다못해 첫사랑의 이름도 '장국강'이다.
이 장면은 2017년 홍콩에서 제작된 영화 <나의 서른에게>의 일부이다.
우연히 보게 된 홍콩영화에서 레슬리를 발견해낸 기쁨이라니!
세상에, 무려 <일락파리>를 소재로 하는 영화라니!
하지만 처음 저 대사를 들었을 때는 배우가 <일락파리>와 <유령개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도 영어자막을 번역한 듯, <일락파리>는 <선셋 인 파리>로, <유령개시>는 <스타팅 프롬 제로>라고 번역되어 있었으니까. 뒤이어 그녀가 척, 하고 꺼내 든 레슬리의 <측면> LP가 화면에 잡히고 나서야 나는 뒷북으로 깨달았다.
꺅! 어머 이거 레슬리 얘기였잖아!!!
<나의 서른에게>는 홍콩의 극작가이자 연극 제작자인 팽수혜가 자신의 연극 <29+1>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홍콩 판 <김종욱 찾기> 정도가 될 듯하다. 아무래도 극 중 레슬리에 대한 묘사가 예사롭지 않아 감독의 인터뷰를 뒤져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작품 속 집주인 조카의 대사와 에피소드는 대부분 팽수혜 본인의 이야기였다.
그녀 본인이 <일락파리>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일락파리>는 TVB의 음악 특집이다. 홍콩의 방송국인 TVB는 인기가수들과 함께 그들의 히트곡을 모아서 음악극을 제작해왔는데, 그중 한 편이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말 그대로 음악이 중심에 서기 때문에 한 편의 긴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한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TVB 음악 특집은 인기스타라면 응당 출연해야 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그런데 <일락파리>는 TVB가 제작한 수많은 음악 특집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작품이다. 89년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이었던 파리 로케이션에, 무려 오우삼이 연출을 맡았고(그는 카메오로도 등장한다), 장만옥과 종초홍이라는 역대급 캐스팅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덕분에 오래도록 사랑받은 작품이었던지 1999년에는 레슬리가 장백지, 구숙정과 함께 <左右情缘(좌우정연)>이라는 음악극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팽수혜 감독처럼 <일락파리>를 보면서 파리를 막연히 동경했던 것 같다.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작품을 본 뒤부터 집에서 멀리 있는 빵집에 가서 바게트빵을 품에 꼭 안고 돌아오곤 했던 것이. (체인점이 많지 않았던 당시엔 바게트를 파는 빵집이 흔치 않았다) 너무나도 한국적인 거리를 걸으며 ‘여기는 파리야’하고 상상했던 것도. 그러자 다른 추억들도 실타래처럼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지금같으면 화질이 나빠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지글거리고 흔들리는 화면. 하지만 그 속에서 완벽하게 빛났던 배우와 음악, 그리고 파리. 무엇보다 레슬리의 미모가 절정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내가 이 작품을 놓고 고민했던 수수께끼도 생각났다. 그것은 ‘장만옥이 도대체 무슨 거짓말을 한 것인가’였다.
자막이 없었기에 그림과 정황만으로 스토리를 이해해야 했던 시절. 극 중에서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종초홍을 선택했던 장국영은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장만옥에게 돌아가 결혼을 준비한다. 하지만 장만옥이 레슬리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들통나면서 세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살게 된다. 결국 이 삼각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장만옥의 거짓말인데, 자막이 없으니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는 이런저런 추측만 무성했었다.
알고 보니 극 중 장만옥이 오우삼과 양다리였다는 썰, 장만옥이 레슬리의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 아이의 아버지는 오우삼이었다는 썰, 장만옥이 종초홍을 중상모략한 것이 들킨 것이라는 썰...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수준의 추측들이 난무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진실이 무언지 무척 궁금했는데, 언제부터인가는 이 작품 자체를 아예 잊고 살았다. 문득 다시 궁금해져 묵은 궁금증을 풀 겸 검색을 해보니, 장만옥이 했던 거짓말은 "불치병에 걸렸다" 였다고. (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편으로는 영화 속에서 서른을 맞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일락파리>의 기억을 되짚다 보니 어느새 영화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주인공은 방황 끝에 파리의 에펠탑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떠난 파리에서 집주인의 조카를 만나 함께 셀카를 찍는다.
그들의 등 뒤로 부서지는 햇빛과 함께 레슬리의 노래 <由零開始>가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암전된 화면에 나타나는 한 줄의 메시지.
每一個階段也是由零開始 (모든 꿈의 시작은 0이다)
서른을 앞둔 불안을 다룬 이야기 자체는 나와 너무 먼 이야기같았지만, 계란 한 판을 선물로 받았던 나의 서른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레슬리에 대한 음악과 추억을 더듬다보니 어느새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렇게 또 한 번, 다른 이가 추억하는 레슬리를 만났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덧붙이는 글,
1. 극 중 집주인 조카를 연기한 배우 '정가의'가 아무래도 낯이 익어서 검색해보니, 정소추와 심전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심전하는 홍콩 보복산의 레슬리의 위패 옆자리에 안치되어 있는 배우이자 코미디언이다. 낯이 익었던 것은 그녀가 엄마를 많이 닮았기 때문인 듯 하다.
2. 넷플릭스 담당자님, 혹시 이 글을 보시고 자막을 수정하고 싶으시다면 연락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