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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희 May 28. 2020

원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루어진, 장국영에 대한 꿈

나의 레슬리 ep41 : 장국영과 함께 걸어온 시간들 (7)

"13년 전에 저는 어떤 기회를 통해 연예계로 뛰어들게 되었어요. 그 후 어릴 때부터 늘 외로웠던 나는, 주위의 좋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함께 일하는 장국영, Leslie가 되었습니다. 왜 굳이 Leslie라고 이야기하냐면, 사실 어릴 때에는 Bobby(홍콩식 발음으로는 '뽀삐')라 불렸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다른 애완동물과 헷갈릴까봐서 이름을 조금 섹시하게 Leslie로 바꿨죠. (웃음)"



1990년 가수 은퇴 콘서트에서 장국영이 한 이야기이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원래 이름은 Leslie 가 아니라 Bobby라는 이야기를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유튜브에서 자막버전으로 영상을 본 뒤부터는 ‘어릴 때부터 늘 외로웠던 나는(從一個小時後一直孤單的我)’ 이라는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마음에 남았다.


어릴 때부터 늘 외로웠던 아이. 부모도 형제도 관심을 주지 않고 오직 유모와 붙어 지내며 외로움을 달랬던 아이. 그래서 부모를 늘 원망하면서도 사랑했던 아이. 장국영의 되기 전의 장국영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늘 쓸쓸하다.

그래서 장국영의 눈빛이 늘 그렇게 쓸쓸한 것은 어린시절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영화 <아비정전>에서 유모를 어머니로 알고 자란 영화 속 아비의 모습과도 묘하게 오버랩되고.



그런데 알고보니 '레슬리'가 그의 원래 영어 이름이 아닌 것처럼, '장국영' 역시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장국영이 되기 전, 어린시절 그의 이름은 '장발종(張發宗)'이었다. 형제들이 모두 '발(發)자' 돌림을 썼다는 것 같다. 사실을 알고 나니 '장국영은 어쩜 이름도 장국영이람!' 감탄하고 '세상에 영어 이름도 레슬리야!'하며 감격해했던 마음이 조금 머쓱해졌다.


그래서인지 가끔씩은 그가 레슬리 장국영이 아니라, 바비 장발종이었어도 그의 팬이 되었을까 심각하게 고민해보곤 한다. ' 좋은데, 이름 하나가  아쉽단 말야' 하면서도 지금처럼 열심히 좋아했을까. 아니면 이름이 아쉬워서 팬까지는 되지 않았을까.


글쎄,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팬이 되기는 했겠으나, 그래도 지금같은 마음까진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은 부르는 이름의 에너지에 따라 일이 잘 풀리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하니. 그를 부르는 이름이 지금과 달랐다면, 내 마음 속의 에너지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으려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국내에 발매되었던 1집 과 2집 <情人箭>. 두 장의 앨범이 합본으로 발매되었다. 흰 양말을 신은 레슬리의 핑크빛 쓰레빠가 참 목이 메이는 앨범이다.


이미 장국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지금의 장국영 아니었던 시절도 있었다. 쉽게 말하면 무명의 시기도 있었다.  6-7년의 시간이었다. 처음엔 무명이 꽤 길었구나 싶었지만, 그가  토크쇼에서 말했던 것을 인용해보자면 당시에 홍콩연예계에서 성공하려면 10 무명은 당연한 으로 보았다고 한다. 오히려 비교적 빠르게 성공한 축에 들었던 모양이다.


무명의 시기는 홍콩 최대 방송국이 주최하는 음악 콘테스트에서 2위로 입상하고  음반을 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앨범 판매량이 저조해서 덤핑가격인 1달러에 판매되었기에,  시기의 레슬리는 방송국에서 월급만 나오면  앨범을 사들이는 것이 일이었다고. 하지만  시절의 그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앨범에 얼만큼의 로열티가 붙게 되었는지.


실제로 레슬리가 전성기를 누리는 수십년동안 이 앨범은 그의 디스코그래피 맨 앞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없는 유니콘과도 같은 존재였다. 마치 수학공식처럼 장국영은 <I like dreaming>이라는 앨범으로 가수로 데뷔했다고 회자되지만, 이 노래를 들어봤다는 사람을 (적어도) 나는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늘 나의 수집욕을 자극하는 앨범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앨범이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세상을 떠나고  뒤였다. 마찬가지로 제목만 알려져있던 2 <情人箭(정인전)> 함께 발매되었는데, 당시  좋게도 나는  앨범의 한국어 버전 속지에 들어가는 가사해석과 앨범리뷰를 맡았다. 덕분에 그의 부재에 한참 괴로워하던 시기에, 수백번도 넘게 스무살 장국영이 부르는 똑같은 노래를 듣고  들으며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 어려운 광동어 가사를 밤새워 해석하고  해석했었다.



당시의 앨범 리뷰. 2003년 6월에 발매된 앨범이었다.



사실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다. 1989년, 처음으로 국내에 발매된 앨범을 들었을 때부터 품었던 꿈이었다. 나의 첫 장국영 앨범이었던 <The Greatest Hits of Leslie Cheung>의 앨범 리뷰를 썼던 월간 스크린의 이경기 기자의 글을 본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언젠가는  기자님처럼 나도 레슬리의 앨범을 리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이름을 나란히 올리고 싶다고. 그가 가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잠시 잊혀졌지만, 컴백소식을 들었을  가장 먼저 되살아난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수 컴백 이후 그의 앨범은     늘어갔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꿈을 이루게   같지는 않았다. 당시에 나는  과는 너무나도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 꿈이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인생에서, 그리고  덕질인생 중에서최상위권에 속하는 아이러니였다.

그저 그의 작품 어딘가에  이름 석자를 새겨넣고 싶은 마음이었다. 건물을 짓고나면 기둥 한 켠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는다는 목수처럼,  역시  덕질의 방점을 그렇게 찍고 싶었더랬는데.. 이런 식으로 꿈이 이루어질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꿈을 이룬 것이고, 설령 꿈이 아니었대도 내가 사랑한 스타의 앨범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그를 추억하며 발매된 앨범이라니. 작업을 하는 내내 마음 한켠이 모래성처럼 계속 슬슬슬 허물어져 내리는  같았다.

그래서 아직 소년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래  그의 목소리를 듣고  들으며 가사를 번역하고 리뷰를 쓰는 내내 속으로 외쳤다. 누구를 향해 외쳐야  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외쳐댈 뿐이었다.


‘당사자가 없는데 이제와서 미공개 앨범이며, 리뷰가 다 무슨 소용이야.

이 앨범 몰라도 되고, 리뷰 같은거 안 써도 된다고. 꿈이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 건 반칙이잖아.

이 꿈 없던 것으로 물러줄테니, 내 장국영 다시 내놓으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GLug-yYF6yU

팬이 과거의 사진들을 모아서 만든 1집 타이틀곡 <I Like Dreaming>의 뮤직비디오




그렇게 힘들었던 기억 때문인지, 이 앨범은 그 뒤로 잘 듣지 않았다. 그래서 늘 CD장에 박제된 듯 자리하고 있던 앨범을 아주 오랜만에 꺼내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앨범 커버를 장식한 갓 스무살을 넘긴 레슬리의 얼굴은 아기같고, 속지를 채운 스물일곱 살의 나의 번역과 글은 허술하기 그지 없다.


꼭 어린시절 못난 얼굴을 하고 있는 사진으로 채워진 앨범을 들춰본 것 같은 기분이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른 후에 들춰볼 수 있는 기록들이 있어서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드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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