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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희 Apr 06. 2023

장국영을 그리는 스무 번째 만우절

나의 레슬리 ep50 : 장국영 20주기 추모 콘서트 繼續寵愛 音樂會

지금도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장국영이라는 이름 석자 뒤에 16개의 숫자가 붙은 것을 처음으로 보았던 때. 19560912라는 익숙한 숫자 뒤에 물결표시와 함께 20030401이라는 생경한 숫자가 덧붙여져 있었다. 굳은 채로 한참 동안 멍하니 그 숫자들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거짓말 같았던 순간이 지난 후에도 해마다 만우절은 돌아왔고 그때마다 저 16개의 숫자도 다시 소환되었다. 사람의 인생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경제적이고도 공허한 일이라는 생각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훌쩍 흘러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었다.






20주기를 두고 올 초부터 홍콩이 들썩거렸다. 유니버설 뮤직에서는 remembrance Leslie와 Remembering Leslie라는 두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가동했다. 전자는 장국영의 기존 히트곡을 새로운 감성으로 리믹스해 내는 재해석 프로젝트이고, 후자는 유니버설 뮤직의 신예들이 그의 노래를 다시 부르는 리메이크 프로젝트이다. 1월부터 리믹스와 리메이크가 한 곡씩 차근차근 공개되기 시작했는데, 리믹스 프로젝트의 첫 번째 곡이었던 <無心睡眠(무심수면)>은 발표 당시 36년 만에 라디오 차트 1위에 다시 오르는 어마어마한 역주행을 이뤄냈다. 반면에 리메이크 프로젝트는 ‘클래식을 훼손한다’는 세간의 우려 속에 시작되었다. 한 유명 DJ는 “장국영의 노래를 강간하는 일이다”라는 과격한 표현을 써가며 장국영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생전의 매니저였던 진숙분은 지난 10주기 기념 콘서트에 이어 20주기를 기념하는 공연을 열겠다고 나섰다. 20주기 이후로는 더 이상 기념 콘서트를 열지 않겠다는 선언을 덧붙여서. 10주기 공연 이후 수익금 정산을 두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이번 공연을 두고도 여러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저 일개 팬인 나로서는 누가 어떤 식으로든 20주기를 잊지 않고 기념한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노래가 발표되면 감사한 마음으로 들었다. 특히나 미발표곡이 공개될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또한 공연 예매에도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재수 끝에 겨우 성공했지만, 예매에 실패한 날은 분해서 잠이 다 오지 않았다.

그런데 겨우 티켓팅에 성공하고 홍콩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던 어느 날, 4월 1일에 또 다른 추모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유니버설 뮤직이 완차이에서 주최하는 것이라고 했다. 추모 행사를 둘로 나눠서 한다니. 조금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이 여전히 뜨겁게 기억되는 증거일 거라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3월 31일 홍함체육관의 모습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3월의 마지막날 홍콩공항에 내려서 마스크를 고쳐 쓰는데 기분이 묘했다. 레슬리는 사스(SARS)로 홍콩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 떠났는데, 20주기를 기념하는 2023년에도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이 광경을 멀리 한국에서 보았던 나도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데, 당시 홍콩에서 그를 보냈던 사람들의 소회는 어떠할까.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침사추이로 들어가는데, 창 밖의 풍경도 도로도 전과 달라져 있었다. 이 버스를 마지막으로 탄게 언제였나 헤아려보니 6년 만이었다. 6년 만에도 길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20년이 지났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 긴 시간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겟을 찾으러 하루 먼저 찾은 홍함체육관도 주변 모습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 없는 낮시간에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1996년 과월연창회, 2000년 열정연창회, 2013년 계속총애 10주기 콘서트. 세 공연을 보러 왔고, 생전의 콘서트는 일주일씩 연속관람을 해서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지만 생각해 보니 모두 해가 진 후에 왔었다. 대낮의 홍함체육관은 화장을 지운 맨얼굴 같은 모습이었다. 공연장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보며 과월연창회 때 레슬리의 퇴근길을 지켜보던 자리가 어딜까 생각해 봤지만, 내가 기억하는 동선과 지금의 동선이 영 맞지 않았다.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인지, 공연장 앞 도로가 바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레슬리가 고사를 지내고, 무대의상을 차려입은 막문위가 경호원도 없이 팬들을 제치고 들어가던 백스테이지 입구에는 스태프들이 무대장치를 연신 나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게시판에는 4월 1일에 공연될 장국영과 4월 17일에 공연될 허관걸의 포스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장국영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지워내고 나니, 그와 허관걸이 나란히 사이좋게 콘서트를 여는 것처럼 보였다. 생전에 실제로 그랬던 적도 있지 않았을까.


사실 나는 이번 홍콩행에 앞서 한 가지 이상한 결심을 했었다. 그저 공연만 보고 조용히 돌아가겠다는 결심이었다. 어지간한 전시물은 10주기 당시에 대부분 보기도 했지만, 공연에다 전시까지 보고 난  후의 후폭풍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공연을 보고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에만 들르는 것으로 나만의 401을 보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티켓을 찾은 뒤에 호텔로 돌아오는데 거리 곳곳에 레슬리가 보였다. 전시도 열린다고 하고, 영화 기획전도 많이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렇게 예고 없이 그의 얼굴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Leslie is everywhere”였다.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러 간 스타의 거리에는 그의 노래들이 피아노 연주 버전으로 흐르고 있었고, 식당에서도 끝없이 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3월 31일과 4월 1일은,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BGM이 장국영이었다. 온 홍콩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공연 입장 전에 한 컷


그리고 4월 1일 밤, 다시 찾은 홍함체육관은 인파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겨우 일행과 만나 공연장에 들어서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과월연창회와 동일한 원형무대였다. 순간, 27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만히 무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대가 비워져 있었던 그날과 달리 오늘의 무대 위에는 레슬리 얼굴이 새겨진 주화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과 다른 것은 또 있었다. 전에는 레슬리의 얼굴이 잡힐 듯 보였던 앞 좌석이었지만, 오늘은 3층 하고도 제일 뒷자리였다. 두 섹션을 헤매며 등산하듯 계단을 올라 자리를 찾아 앉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공연이 시작되었다. 장국영 본인의 노래로 마무리된 피날레를 제외하면 총 17팀이 무대에 섰다. 그리고 그중에서 제일 마음에 남았던 무대들을 추려본다.


Setlist

1. 정흔의 -  當年情
2. 장위건 - 一片痴, 爲你鍾情, 儂本多情, 我, 明星
3. Supper Moment - 始終會行運, 默默向上遊
4. 신인가수들 - Stand Up, 少女心事
5. 담요문, 신인가수들 - 拒絶再玩, 不羈的風
6. 담요문 - 無需要太多
7. 주혜민 - 如果你知我苦衷, 痴心的我
8. 포지륜 - 側面, 黑色午夜
9. 포지륜, 임혁광 - 沉默是金
10. 임혁광 - 想你
11. Gin Lee - 追, 路過蜻蜓
12. 진송령 - 今生今世
13. 진송령, 우의 - 深情相擁
14. 우의 - 霸王别姬, 當愛己成徍事
15. 종진도 - 倩女幽魂, 由零開始
16. 원영의, 장지림 - 緣份, 左右手, 你在何地, 紅
17. 진결영 - 只怕不再遇上, 誰令你心痴
18. 우의 - 從未遠離
19. 황낙연 - 烟花燙
20. 고거기 - Dear Leslie, 風繼續吹
21. 곽부성 - Monica, 有誰共鳴
22. 장국영 - 共同渡過



심전하와 나문, 레슬리의 위패 / 생전의 레슬리, 매염방, 진숙분, 심전하 / 2023년 공연에서의 정흔의 / 영화 29+1의 한 장면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요새 홍콩에서 가장 핫한 여자가수 중 하나인 정흔의가 <當年情(당년정)>으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그녀는 영화 <나의 서른에게 (원제 29+1)>에서 음악드라마 ‘일락파리’의 광팬을 연기했던 배우 겸 가수인데, 생전에 레슬리와 절친했던 뚱뚱이 누나 심전하의 딸이기도 해서 더욱 눈길이 갔다. 혹시나 어린 시절에 레슬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뒤져봤는데 아쉽게도 수확이 없었다.

레슬리와 어머니인 심전하가 절친한 사이라서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는데 (물론 나는 광동어를 못 알아듣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공연의 시작을 알리고는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신수가창대회 당시 / 사촌형제설 부인 기사 / 1999년 경가금곡 시상식 / 2023년 공연에서의 장위건 (왼쪽부터 시계방향)


그 뒤에는 장위건이 등장해 무려 5곡을 불렀다. 다른 게스트의 출연이 돌연 취소되어서 땜빵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긴 무대였다. 좀 지루해지려는 찰나, 레슬리와 관련된 장위건의 아주 귀여운 일화가 생각났다. 이른바 '가짜 사촌동생 사건'이다.


가수를 꿈꿨던 장위건은 데뷔 전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하면서 낮에는 잡지사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레슬리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는 우연히 편집장 책상 위에서 레슬리의 전화번호가 적힌 것을 보고 몰래 메모해왔다고 한다. 그리곤 틈날 때마다 레슬리의 집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 "장국영 씨 계신가요?"하고 물었단다. 이 전화는 무려 반년 넘게 이어졌는데 번번이 일하는 사람이 전화를 받아서 통화가 성사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잡지사에서 해고된 후 여느 날처럼 레슬리의 집에 전화를 건 장위건은 드디어 수화기 너머로 "제가 장국영입니다"라는 답을 듣게 된다. 드디어 레슬리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레슬리는 장위건이 너무 놀라서 말을 하지 못하는 동안 인내심 있게 그를 기다려줬고, 그는 마침내 "안녕하세요, 저는 장위건이라고 합니다. 술집에서 노래하고 있는데, 당신 노래를 너무나도 좋아합니다"라는 고백 같은 말로 첫마디를 뗐다. 그날 장위건은 가족과 일, 노래로 인해 겪은 비참했던 경험들을 털어놓았다는데, 이야기를 모두 들은 레슬리는 "내일 나를 찾아오면 도와줄 친구를 소개하겠다"고 선뜻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자신을 찾아온 장위건을 주위사람들에게 "내 사촌동생이고, 이름은 장위건이야."라고 소개했다.


그 후 장위건은 1984년 제3회 신수가창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하는데, 이때 부른 곡은 장국영의 <戀愛交叉(연애교차)>였다. 사실 레슬리는 "내 곡 말고 알란탐의 "愛的替身"을 부르는 게 좋겠어"라고 제안했다는데, 장위건은 그 몰래 참가곡을 골라 출전했다. 그해 우승 시상자 또한 공교롭게도 레슬리였는데, 덕분에 세간에는 "장국영이 사촌동생 장위건을 밀어줬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친척이 아님을 밝히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 일화를 떠올리고 나니, 장위건이 왜 다섯 곡이나 되는 노래를 쉬지 않고 부르는지 곧바로 이해가 되었다. 게다가 10주년 공연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이 밤이 무척 특별한 무대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니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89년 경가금곡 인터뷰 당시 / 시티보이즈 촬영 당시 뒤풀이 장소 / 2023년 공연에서의 주혜민 / 시티보이즈 스틸컷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레슬리와 꽤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는 주혜민도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RTHK에 입사해 TV프로그램 진행자로 연예계에 데뷔해 이후 가수와 배우로 영역을 넓혔다. 인형 같은 미모로 90년대를 대표하는 '玉女스타'로 손꼽히는 인물인데, 리포터로 활동하던 당시 레슬리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여러 차례 만난 바 있다. 특히 1989년 경가금곡 시상식에서는 당시 고별연창회 진행 중인 레슬리를 홍함체육관으로 찾아가 인터뷰하고 트로피를 전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주혜민은 당시에도 가수활동을 하고 있을 때라, 엄밀히 말하면 1989년 경가금곡은 주혜민이 후배가수로서 선배가수 장국영을 인터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주혜민은 레슬리가 배우로 복귀한 후 출연한 영화 <시티보이즈>에서 상대역을 연기한 후, 그가 작곡한 노래를 받아 부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날 공연에서는 그 노래 외에도 레슬리의 노래 <痴心的我(치심적아)>를 불렀는데, 이 곡은 오늘 처음 불러본다고 말하면서 조금은 긴장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痴心的我(치심적아)>는 화사한 종이 위에 반득하게 눌러쓴 편지를 노래로 듣는 기분이었다.




80년대 어느 날의 종진도와 레슬리 / 2023년 공연에서의 종진도 (왼쪽부터)


알란탐과 함께 그룹 'Wynners(위너스)'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阿B(아비)라는 애칭으로도 사랑받은 종진도는 <倩女幽魂(천녀유혼)>을 부르며 등장했다. 관록이 넘치는 무대였고, '역시 짬밥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자리였다. 그리고 노래를 마친 그는 세간에 잘 알려진 영화 <구성보희>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일전에 다른 글에서 소개했던 일화라 원문을 그대로 가져와본다.


이 작품은 1988년 개봉되어 큰 성공을 거뒀던 영화 <팔성보희>의 리메이크작이다. '여덟 개의 별이 행복을 전합니다'라는 영화의 원제처럼 리메이크작 역시 8명의 주인공이 정해졌는데,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에 제목이 바뀌고 출연자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사정은 이랬다. 당시 선배인 종진도가 경제적으로 파산에 이르러 어려운 형편이라는 소식을 들은 장국영이 제작사에 건의해서 '8성'을 '9성'으로 바꾼 것이라고. 덕분에 영화의 스토리도 조금 달라졌다고 하는데, 하지만 정작 종진도 본인은 그 사실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구성보희> 덕분에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종진도는, 2018년 <To Bee Continued>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연작 싱글에서 장국영의 노래를 다시 불렀다. <由零開始(유령개시)>, 0에서부터의 시작을 의미하는 노래 제목과 "나를 기억해 주겠느냐"는 가사가 종진도의 개인사와 맞물리며 묘한 여운을 남긴다. 예상대로 종진도는 뒤이어 이 곡을 불렀는데, 그 사이 조금 더 나이 든 종진도의 목소리와 노래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 위에서의 원영의와 장지림


종진도에 이어 등장한 원영의와 장지림은 각자 내레이션과 노래를 맡았다. 원영의가 레슬리와의 일화들을 소개하면 장지림이 그에 어울리는 노래를 부르는 식이었다.

원영의가 "1986년 레슬리의 콘서트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것이 레슬리와의 연분이 시작된 시점이었다."라고 내레이션 한 후에는 장지림이 <緣份(연분)>을 불렀고, "레슬리와는 다섯 편의 영화를 작업했다. 장지림과 연애하던 당시에 새 영화의 관객 반응을 보러 레슬리, 장지림과 셋이서 몰래 극장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때 왼쪽을 봐도 장선생이, 오른쪽을 봐도 장선생이 있었다. 부럽지 않나요?"라는 원영의의 멘트 후에는 <左右手(좌우수)>가 이어졌다. 그리고 "레슬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촬영을 마치고 집에 가던 중이었다. 운전을 할 수 없어서 한참 괴로워하다가 집에 가서 소파에 몸을 던지고는 '꺼거, 지금 어디에 있어요?'하고 혼자 말했다"는 내레이션 뒤에는 <你在何地(니재하지)>가 흘렀다. 그리고 두 사람의 무대는 장지림이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 <紅(홍)>으로 마무리되었다. (내레이션 내용은 공연 당시에 이해한 대로 쓴 것이며 실제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원영의와 장지림은 레슬리와 절친했지만, 그로 인한 루머에 오래도록 시달렸던 이들이기도 하다. 원영의가 레슬리를 오랫동안 짝사랑했지만, 이를 이룰 수 없자 그와 닮은 장지림과 연애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셋이서 함께 관객 반응을 보러 몰래 극장에 다니곤 했다니,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사이였구나 싶다. 그리고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핸섬한 장선생이 있었다는 원영의가 새삼 부러워졌다.




먼 과거의 두 사람 / 90년대 말의 모습 / 2023년 공연에서의 진결영 (왼쪽부터)


이 날 공연에서 나를 가장 많이 울렸던 주인공은 의외로 진결영이었다. 그녀는 레슬리와 화성음반사에 함께 몸 담았던 시절에 그와 두 곡의 듀엣곡을 불렀는데, 이 날 공연에서 이 두 곡을 모두 선보였다. 먼저 부른 곡은 훗날 막문위와의 듀엣으로도 유명해진 <只怕不再遇上(지파부재우상)>이었다. 레슬리의 목소리 없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홀로 불렀다. 그런데 서로의 목소리를 북돋아주며 부르던 듀엣 버전과는 달리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 두려울 뿐"이라는 구절을 있는 힘껏 불러내는 그녀의 목소리가 묘하게 나를 울렸다. 그 사이 나이 든 그녀의 목소리와 어우러져서 다시 만나지 못하는 슬픔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이제껏 들어본 어떤 버전보다 애절하고 애통했다. 덕분에 마스크 안으로 주룩주룩 눈물이 흘러드는 것도 모르고 울었다.

이어서 부른 <誰令你心痴(수령니심치)>에서는 막문위가 10주기 공연에서 선보인 것처럼, 과거의 레슬리와 현재의 진결영의 듀엣으로 꾸며졌다. 먼저 들은 곡에서 터진 눈물은 한창때 낭랑한 레슬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폭발해 버렸다. 한 사람은 떠나고 다른 한 사람은 남아 과거의 목소리에 현재의 목소리를 더하는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펐다. 두 사람이 나란히 손잡고 서서 부르는 노래였다면, 이라는 가정이 마음에서 떠나지 못했다.




고거기의 리포터 시절 / 레슬리 60세 기념 앨범 Dear Leslie 커버 / 2023년 공연에서의 모습 / 13주기 콘서트에서 눈물 흘리는 고거기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고거기 역시 레슬리와 꽤 역사가 깊은 인물이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레슬리를 추모해 온 인물이기도 하다. 레슬리가 60세가 되던 해에는 <Salute to Dear Leslie>라는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했고, 가미회가 주최하는 추모의 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해 왔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도 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예상대로 공연의 말미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고거기는 장국영의 노래를 공식적으로 가장 많이, 다양하게 부른 가수라서 어떤 곡을 부를지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했었다. 그런데 리메이크 앨범 <Salute to Dear Leslie>에 수록된 유일한 신곡이었던 <Dear Leslie>, 그리고 <風繼續吹(풍계속취)>를 부른 그의 무대는 조금, 아니 무척 의외였다. 사전에 공개된 라인업 상으로 봤을 때 고거기의 등장은 공연의 응당 클라이맥스를 장식해야 했다. 하지만 두 곡 모두 조금은 담담하다 싶게 끝나버렸다. 고거기가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 아는데 왜 이렇게 끝맺음을 할까 머릿속에 물음표가 하나 가득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잠깐 이렇게 공연이 끝나는 건가 당황했었다.




영화 <호문야연>의 한 장면 / 2023 공연에서의 곽부성 / 90년대 어느 날의 두 사람


하지만 이내 의문이 풀렸다. 사전에 공개되지 않은 서프라이즈 게스트가 있었다. 고거기의 무대가 끝나고 환해진 무대 위로 <Monica>의 전주가 흘렀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무대 밑에서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곽부성이었다. 말 그대로 깜짝 손님이라 관객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리고 그는 <Monica>의 후렴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공연을 단숨에 클라이맥스에 올려놓았다. 덩달아 나도 사놓고 쓰지 않았던 응원봉을 꺼내 특유의 안무에 맞춰 신나게 흔들었다. 과연, 사대천왕은 사대천왕이구나 싶었다.

곽부성은 사실 레슬리와 개인적인 연이 두텁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다. 소속 음반사도 다르고 함께 한 작품도 없다 보니 다른 사대천왕들에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접점이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홍콩의 댄스가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두 사람은 계보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80년대에 장국영이 있다면, 90년대에 곽부성이 있음은 틀림없으니까. 언젠가 레슬리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꼬마에게 "난 곽부성이야"라고 소개했다는 일화를 보면, 어쩌면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共同渡過(공동도과)를 부르는 열정연창회에서의 모습


그리고 공연의 대미는 장국영, 레슬리 본인이 장식했다. 그가 23년 전 열정연창회에서 불렀던 <共同渡過(공동도과)>가 흐르고, 출연했던 모든 가수와 관객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3시간이 훌쩍 넘게 진행된 공연은 막을 내렸다.

나 역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생각했다. 늘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랐던 레슬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나 많은 팬들이 자신을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고. 남겨진 이의 유치한 바람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를 그리워하는 수많은 마음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어디로든 가서 닿았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나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스무 번째 만우절이 끝났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난 뒤.. 무대 위에 남아있는 붉은 종이학


사실 이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나는 많이 두려웠다. 10주기 공연을 본 후의 후폭풍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는 동안에는 떼창을 해가며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관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순간부터 마음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졌다. 96년과 2000년에 그가 직접 무대 위에 서서 노래했던 공연이 끝난 후 걸었던 길을 따라 호텔로 돌아가는데 허탈하고 공허하고 끝 간 데 없이 슬펐다. 호텔 앞에 도착해서도 괜히 건물 근처를 빙글빙글 돌면서 한참을 걸었는데도 도저히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방으로 올라갔더니 다른 날도 아닌 만우절에 나를 혼자 홍콩에 보낼 수 없다며 따라온 친구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무언가를 말로 토해내야, 그래야 이 밤이 끝날 것 같았는데 깊은 잠에 빠진 친구는 잠꼬대처럼 "그럴 땐 자야 하는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는 매정히 돌아누웠다. 결국 친구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씻고서도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그저 창 밖만 바라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그걸 또 해야 한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공연을 보러 간 사람은 주변에 나 하나뿐이었던 10년 전과 달리, 꽤 많은 분들이 홍콩에 날아왔다. SNS 친구들이 홍콩 각지에서 올린 피드만 봐도 외롭지 않았다. 비록 서로 얼굴도 본명도 모른다 해도 공연을 함께 기다리는 누군가와 이 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그리고 공연 전과 후에는 지인들과 만나 식사도 하고 수다도 떨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외롭거나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에도 호텔로 돌아와 그 밤 내내 잠들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봤지만.





덧붙이는 글.


아주 오랜만에 롤러코스터를 탄 듯 감정이 폭발했던 밤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사실 공연의 라인업이 발표된 것을 보았을 때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공연이 둘로 나뉜다는 사실은 앞서 말했듯 이미 알고 있었다. 양측에서 서로의 라인업을 뺏길까 봐 날을 세우고 있다는 기사도 익히 읽은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연에 참여하는 아티스트의 면면은 예상 밖이었다. 양조위가 사회를 보고 장학우, 진혜림, 막문위, 용조아, 고거기, 주혜민, 장지림 초맹, 황요명, 허지안, 소영강, 밴드 태극 등이 출연했던 10년 전에 비해, 올해 라인업은 상대적으로 초라했다. 아는 이름보다 모르는 이름이 더 많았다.


사실 추모공연이라고 해서 꼭 생전에 연이 있었던 사람들만 출연하라는 법은 없다. 장국영과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 추모공연의 의의라고 생각한다. 신인이라고 해도 레슬리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보아도 출연진의 구성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특히나 대륙 출신의 우의가 라인업의 최상단에 올라있던 것이 의문이었다. 사실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고, 가수인지 배우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공연을 보니 그가 출연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경극 '패왕별희'를, 그것도 우희와 패왕의 노래를 모두 혼자서 불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경극을 넣어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광동팝을 대표했던 아티스트였던 만큼, 배우로서 연기했던 역할보다는 가수로서의 레슬리에게 좀 더 집중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어 못내 아쉽다.


그리고 공연의 말미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내레이션이 등장해 당황스러웠다. 이는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팬들이 아티스트를 기억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 다분히 개인적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대해 동감하기가 어려웠다는 의미이다. '방해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던 관객이 나 하나뿐이었을지 궁금해진다.

물론 그의 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개런티 등으로 논란이 많았던 10주기 공연에 이어, 이번 20주기 공연은 아예 둘로 나뉘어버렸다. 게다가 완차이에서 열리는 공연은 여명, 진혜림, 양영기 등 라인업도 좀 더 화려했다. 그래서 아마도 홍함 측에서는 이른바 '원조' 혹은 '정통성'을 주장하고 싶지 않았을까. 내 짐작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등장 덕분에 나는 철철 흐르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뚝 그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홍함에서 울고 웃었던 그 밤이 어느새 닷새 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기억은 빠르게 흐릿해지지만 반면에 감정은 점점 팽창해가고 있어서, 무언가 풀어내야 이 감정이 갈무리될 것 같아서 내용도 없이 터무니없이 긴 글을 썼다.

4월 2일에 방송되었던 <그대와 야반가성> 레슬리 20주기 추모 특집 편의 엔딩멘트를 인용해 본다. 장학우의 신곡 <又十年(또다시 십 년)>에는 "몇 번의 십 년이 더 남아있을까"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 가사처럼 나와 레슬리 사이에 몇 번의 십 년이 남아있을지, 우리가 모두 함께 기념할 수 있는 십 년이 몇 번이나 될지 헤아려본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모르겠다.

하지만 10주기 공연을 보고 돌아올 때 '20주기에도 이러긴 어렵겠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렇게 성대하고 화려한 20주기를 맞이한 것을 보면, 적어도 다음번 10년은 기약해 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래에 공연의 풀버전 영상을 두고 갑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https://www.youtube.com/watch?v=QPL3fBJvGk4&t=5015s

20주기 공연의 풀버전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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