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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희 Oct 10. 2019

1996년 장국영과 두번째 만남 - 첫 홍콩, 첫 공연

나의 레슬리 ep7 : 다섯 번의 만남, 한 번의 대화 (2)

언제 장국영을 또 보겠냐는 결연한 마음으로 고3 마지막 시험을 장렬하게 망친 보람도 없이, 나는 1년 뒤인 1996년 장국영을 또 보게 되었다.


가수 컴백을 한 그가 이듬해에 홍콩에서 콘서트를 한다는 발표를 한 것이다.


당시 몸 담고 있던 팬클럽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듯 단체관람을 추진했다. 선희언니는 콘서트 주관사에 직접 연락을 넣어 한국 팬클럽임을 밝히고 단체 티켓을 구했다.

우리는 선발대와 후발대로 일정을 나누어 돈을 모아 침사추이에 있는 한 한인민박을 독채로 빌렸고, 우리의 존재를 알리자며 커다란 검은색 하드보드에 핫핑크색 글씨로 ‘韓國 張國榮 F/C 為你鍾情(장국영 한국 팬클럽 위니종정)’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판넬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김포공항에서 난생처음으로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96년 12월 11일, 부회장 언니네 집에 모여서 만들었던 플래카드. 나름 기념사진인데 왜 저렇게 입을 대빨 내밀고 찍었는지...


하지만 출발까지의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항공권과 콘서트 티켓이 지금 기억으로 60만 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모으고 모아도 20만 원을 채울 수가 없었다. 결국 과 동기에게 빌려 해결을 했는데(사실 이 대목에서는 고백을 해야 할 것이 있다. 근로장학생이던 동기의 방학 근무를 대신해주기로 하고 빌린 돈이었는데, 그 방학 동안에 일어난 여러 개인적인 일들 때문에 나는 대리근무를 다 하지도 못했고, 다음 학기부터는 학교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경황이 없고, 연락을 할 방법을 몰라 제대로 사과조차 하지 못했다. 우연이라도 그 동기가 이 책을 읽거나 소식을 듣는다면 나에게 꼭 연락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막상 홍콩에 가서 쓸 체재비가 없었다. 독채로 빌린 민박의 숙박비도 예약금만 치렀을 뿐 잔금이 남아있었고, 홍콩 콘서트에 가면 누구나 하나쯤은 산다는 야광봉도 사서 흔들어보고 싶은데 말이다.


처음 홍콩행을 계획했을 때에는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 후에 멋있게 부모님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내가 너무나도 가고 싶어서 스스로 준비한 것이니 잘 다녀오라고 응원해주세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최저시급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1996년의 시급은 너무나도 약소했고, 갓 스무 살의 꼬맹이에게 돈을 모으고 불리는 재주가 있을 리 또한 만무했다.


결국 나는 홍콩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 부모님에게 SOS를 쳤다. 마침 방학이 시작된 첫날이었다.

낮에는 버스를 타고 종로 2가에 있는 탑항공에 가서 동남아 발권 담당자를 찾아 전화로 예약했던 홍콩행 항공권을 발급받았다. 예약금을 보냈던 무통장입금증을 보여주고서 그만큼을 제한 잔금을 치르고 나니 담당자가 항공권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뜻 모를 먹지가 여러 장 달려있는 두 뭉치의 종이였는데 담당자는 앞에 있는 것은 출국할 때, 뒤에 있는 것은 입국할 때에 사용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종로구청에서 신청해놓았던 여권도 찾았다. 요즘에야 항공권은 모두 전자방식으로 발권되고 여권도 서울시내 모든 구청에서 발급이 되지만, 당시에는 항공권은 꼭 내 손으로 들고 가서 보딩패스와 교환해야 했고, 여권발급이 가능한 구청은 손으로 꼽을 때였다. 난생처음 하는 일들이었지만 모두 홍콩으로 가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그저 즐겁기만 했다. 덕분에 여행 준비를 모두 마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종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준비해놓은 항공권과 여권을 꺼내놓고 부모님을 소환했다. 콘서트 티켓까지 있었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단체 발권인지라 티켓은 홍콩에 가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방학을 맞은 딸내미가 갑자기 할 말이 있다며 소환해서는 무릎까지 다소곳하게 꿇자 부모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당황한 표정은 내가 말을 이어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가장 먼저 홍콩에서 장국영의 컴백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라는 것을 밝혔다. 항공권과 티켓을 준비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홍콩에서의 체류비용이 어느 정도 소요될지를 설명한 다음, 이 비용을 지원해주시면 홍콩에 다녀온 다음에 더욱더 열심히 학업에 임할 것을 피력했던 그 10분 남짓의 시간은 아마도 내 생애 최고의 PT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몇 날 며칠 고르고 고른 멘트들을 말하며 나는 스스로의 설득력에 내심 감탄했다. 이 정도의 신들린 PT를 거절하진 못할 것이라는 자뻑에 취해갔다. 부모님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지는 것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나의 PT가 끝나자 아빠가 보인 첫 반응은 진짜 땅이 꺼지겠다 싶도록 깊은 한숨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진보적이며 다정한 ‘신세대’ 아빠가 되는 것을 추구했으나 실제로는 보수의 끝판왕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아빠를 뒤에서 '파쇼'라고 부르곤 했다) 그래도 혼자서 여행 준비를 하다니 어느새 우리 딸이 다 컸구나 대견해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긴 한숨이라 의외이긴 했다.

하지만 범생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꽤 대범한 축에 속했던 나를 두고 늘 “여자애가 겁(대가리)도 없이”라는 말을 관용어구처럼 사용했던 아빠였기에, 이번에도 어디 겁 없이 혼자 홍콩엘 가려고 하느냐는 질책이 이어지려나보다 싶었다. 그러나 한숨 뒤에 이어진 아빠의 말은 진심으로 상상조차 못 한 것이었다.



“내가 남의 딸을 흉볼 일이 아니었구나...”



기가 막힌다는 듯 허탈하게 웃은 아빠는 “내 딸은 홍콩이라니...”라는 뜻 모를 말만 반복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는 얼마가 필요하냐 물으시곤, 내 대답에 일단 알겠으니 니 방에 가 있으라며 축객령을 내렸다.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이었는데 이틀이 지난 후에야 들은 자초지종은 이랬다. 그해 10월에 온다만다 말 많았던 마이클 잭슨의 첫 한국 공연이 치러졌었다. 무려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2회에 걸쳐 치러진 공연은 96년에 일어난 사회적 빅 이벤트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는데, 이때 강원도 양양에 사는 아버지 친구의 딸이 공연을 보기 위해 상경을 했었단다.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으나 공연을 찾아다니며 보는 타입은 절대 아니었던 아빠로서는 이해 못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깟 마이클 잭슨이 뭐라고’ 양양에서 서울을 무려 1박 2일로 다녀가냐며 그렇게나 흉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 딸은 ‘그깟 장국영이 뭐라고’ 비행기를 타고 일주일이나 홍콩에를 간다니”



탄식이 섞인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아빠로서는 당황스러웠겠구나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누구보다 딸의 팬질을 응원했던 아빠였기에 그 이중적인 태도에 적잖이 실망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술집에 갔다가도 장국영이 나오는 잡지가 보이면 비뚤비뚤 뜯어올 줄도 아는 아빠였는데 말이다.

왜 집에서 하는 팬질은 알뜰하게 응원하면서 직접 찾아가서 하는 팬질에는 이렇게나 억장이 무너져하는지 나로서는 이해불가였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기에, 나는 무사히 홍콩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랜딩의 스릴이 있었던 그 시절의 카이탁 공항.


어쨌거나 첫 홍콩이자 첫 해외여행이었다. 비행기 탑승 직전 슬그머니 사라졌던 일행이 립스틱을 사 온 면세점이라는 곳은 대체 뭐하는 곳이길래 뜬금없이 공항에서 화장품을 파나 싶었고, 비행기에서 밥을 준다는 것도 놀라웠다.

게다가 돈가스를 주문할 때 들었던 밥이냐 빵이냐 라는 질문보다 왠지 몇 수 위인 것 같은 치킨이냐 비프냐라는 선택지도 즐거웠다. 하늘 위에서 먹는 밥은 또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은 문을 닫은 카이탁 공항은 주택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착륙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내가 탄 비행기가 홍콩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오래된 아파트 사이를 지날 때 짜릿한 전율을 느꼈던 것도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출발한 공항도, 도착한 공항도 지금과는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 반환 이전의 홍콩이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머, 나도 꽤 옛날 사람인가 보다.


나는 총 6박 7일의 일정 중에, 4번의 공연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함께 간 다른 언니들은 야경도 보고 쇼핑도 하겠다며 2-3번씩만 공연을 보았는데, 나는 모든 일정을 꽉꽉 채워 보아야겠다며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의 공연까지 알뜰하게 챙겼다. 덕분에 도착 첫날 보았던 빅토리아 피크의 야경을 끝으로 별들이 소근댄다는 홍콩의 밤은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낮에는 <색정남녀>니 <식신>이니 하는 당시 홍콩 개봉관에서 상영 중이던 영화들을 보러 쫓아다니거나, <천녀유혼>에서 왕조현이 장국영을 유혹했던 정자가 있다는 홍콩판 민속촌엘 다녀오거나(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그곳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인터넷에도 검색 결과가 없는 것을 보면 지금은 문을 닫은 모양이다), 장국영이 운영하던 카페에 다녀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음반점을 돌며 옛 앨범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해가 지면 밤에는 콘서트를 보았다. 첫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무색하도록 온통 장국영으로 점철된 여행이었지만 그저 모든 것이 신나고 즐거웠다. 콘서트장 앞은 영화 <금지옥엽>에서 묘사한 것과 똑같이 장국영의 사진이며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과 온갖 현수막을 두르고 나타난 팬들로 북적였고, 일찍부터 스태프 전용 출입구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어느 날에는 무대 준비를 위해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콘서트 게스트 막문위의 모습도 보았다.


그리고 콘서트가 끝난 뒤에 퇴근하는 장국영의 자동차에 손을 흔들어 준 다음 터덜터덜 걸어서 숙소로 돌아가다 보면 내가 걷고 있는 침사추이 뒷골목 하나하나가 다 영화 촬영지처럼 느껴졌다. 장국영과 홍콩 음악, 영화의 마니아인 나로서는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일주일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장국영과 그의 라이브가 주는 감동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跨越(과월)>, ‘무언가를 뛰어넘는다’는 의미로 지어진 콘서트의 이름처럼 장국영의 라이브를 눈 앞에서 보는 것은 내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내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온통 흰 조명 아래에서 고별 콘서트의 대미를 장식했던 <風再起時>를 부르며 온통 흰 조명 속에서 나타난 그는 비현실적으로 멋졌다. 수년 전 촬영된 비디오테이프 속의 장국영이 아니라, 진짜 장국영이 지금 내 눈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떠들었다. 뭔가에 홀린 듯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가슴 한 켠에서 이상한 기분이 든다. 박살 나게 멋있기는 한데, 뭔가 내 장국영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이 기분이 뭐지?


흔히 어린아이들은 영상과 현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유튜브를 통해 만나는 키즈 크리에이터들을 진짜 자신의 친구라고 여긴다고 한다. 덕분에 키즈 크리에이터들은 어딜 가나 난생처음 보는 또래 친구들에게 세상 둘도 없는 베프로 대접받는다고 한다.

첫 공연을 보기 전까지의 나 역시 유튜버를 친구로 여기는 아이들과 같았던 것 같다. 영화 속의 장국영과, 콘서트 속 장국영과, 혹은 인터뷰 속의 장국영과 되새김질하듯 반복해서 만나면서 장국영을 가상의 (남자) 친구쯤으로 느꼈던 것 같다. 늘 보는 그 화면 속 얼굴이 너무나도 친근하고 익숙했기에.


하지만 내 눈 앞에서 진짜로 살아 움직이는 장국영은 뭔가 생경한 느낌이다. 아무리 봐도 그 얼굴 그 목소리가 분명히 맞는데, 늘 보았던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는 장국영은 어딘가 낯설었다. 그저 반갑고 기쁜 마음만 들 줄 알았는데 이 정체 모를 낯선 기분이라니.


어쩌면 애초에 내가 좋아한 것은 장국영이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영상에 촬영된 그 순간의 장국영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영상 속 장국영에게 익숙해져서 진짜 장국영이 낯설게 느껴져 버린 것이다. 인도왕자 같은 인상이었다고 표현했던 첫 만남이 그렇기 강렬하게 기억되는 것 또한 내가 기억하던 순간들의 장국영과 실제 장국영이 달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장국영인 듯 장국영 아닌 장국영 같았던 그 날의 내 국팔씨. 하지만 낯이 익었든 설었든 간에 무대 위의 장국영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원래는 붉은 립스틱을 바르려고 했지만, 멀리서는 보이지 않아 선택한 것이 하이힐이었다고 한다.


<과월콘서트>의 백미는 <紅(홍)>이라는 곡을 부를 때 선보인 ‘빨간 하이힐’이라고들 한다. 이 곡은 콘서트 직전에 발표한 <紅(홍) : Red>라는 광동어 앨범의 동명 타이틀인데, 이 노래를 부를 때 장국영은 붉은 립스틱과 하이힐, 그리고 검은색 스팽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노래가 시작될 듯 시작될 듯, 드라마틱한 전주가 무한정 반복되다가 드디어 노래가 시작되면 무대 밑에서 그가 나타난다. 남자이면서 여자이고, 여자인 듯하면서도 남자인 모습의 장국영은 매혹적이었다. 장국영처럼 젠더라는 화두와 떼놓고 보기 힘든 아티스트가 또 있을까.


그리고 그로 인해 그는 언제나 성 정체성에 대한 의심 섞인 공격을 받고, 같은 말도 묘한 뉘앙스로 와전되는 등 왜 유독 장국영에게만 이럴까 싶은 일들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날 선 시선에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의심들을 시원하게 비웃는 듯한 무대와 연기를 보여주었다.

80년대 아이돌 시절 아수라백작처럼 반은 여자 반은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반남반녀’ 무대를 선보였던 것도, 2000년에 열린 <열정> 콘서트에서는 린스 광고 모델이 부럽지 않을 삼단같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치마를 입고 무대에 선 것도, 아예 대놓고 동성애자를 연기한 <해피투게더>를 선택한 것도 모두 그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본격적인 시작점이 이 <과월콘서트>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장국영이라는 인물을 한국에 대입해보자. 한국사회가 홍콩보다 훨씬 더 경직되어있다는 것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80년대를 주름잡았던 아이돌 출신 슈퍼스타가 여장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고 상상해보자. 그것이 얼마나 힘든 선택이었을지 상상조차 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후폭풍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해내는 것이 장국영의 매력이자 마력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가수가 했다면 경악을 했을 무대도 장국영이라면 끄덕끄덕 수긍이 된다. 연예인으로서, 예술가로서 이보다 더 큰 재능이자 자산이 있을까. 아마 세상 사람들이 그를 향해 그토록 못되게 굴었던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하지만 장국영은 하이힐을 신고 요염했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다시 아이돌 ‘오빠’의 모습으로 돌아가 소녀감성의 댄스곡을 부르고, 또 그다음 순간에는 세상 처절하게 사랑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내가 본 네 번의 공연 중 마지막 날이었던 12월 24일에는 산타모자를 척 눌러쓰고 나타나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를 불렀다.



나는 매일 밤 이어지는 공연이 하루하루 끝나갈 때마다 시간을 붙잡아놓고 싶었다. 하나의 공연이 끝나고 나면 내일의 공연이 기대되면서도 남은 공연 횟수가 아쉬웠다. 내가 홍콩에 산다면 매일이라도 와서 볼 텐데 하는 철없는 생각도 했었다.


여기가 아시아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영국식 매너가 몸에 배어있던 홍콩 사람들, 흔히 동양과 서양이 용광로처럼 들끓는다고 묘사되는 이국적인 풍경, 밤마다 들었던 장국영의 라이브, 거기에 크리스마스 직전의 묘한 흥분까지 더해져 나의 첫 홍콩 여행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기억되었다.

지나간 일은 모두 다 아름답게 추억된다지만, 무엇하나 나쁜 기억 없이 그저 모든 것이 완벽했던 1996년의 홍콩. 나는 이 여행을 통해 장국영만큼이나 강력한 중독 증세에 빠졌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홍콩 앓이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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