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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희 Oct 06. 2019

1995년 첫 만남 - 내가 장국영을 진짜로 보다니!

나의 레슬리 ep6  :  다섯 번의 만남, 한 번의 대화 (1)

학창 시절 내내 '국영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장국영에게 시집을 가겠다는 말도 안 되는 꿈을 키우는 한편, 내가 죽기 전에 실제로 장국영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10대의 나. 

그래서 그가 1995년 [寵愛張國榮(총애장국영)]이라는 앨범으로 가수 컴백을 하고 그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서울을 찾는다는 사실은 내게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하필 그가 서울을 찾기로 한 날짜는 내 고3 마지막 기말고사 기간과 정통으로 겹쳤다. 요새는 어떤지 잘 모르지만, 그 당시 고3 마지막 기말고사라 함은 내신등급의 방점을 찍는 초중고 12년을 마감하는 그랜드 파이널 이벤트였다. 때문에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대로,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대로 모두가 심기일전하여 치르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이 중요한 시험 앞에 나는 너무나도 당연히 장국영을 택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언제 또 볼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어쩌면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보고 싶다는 마음 한 자락 때문에 앞뒤 재지 않고 불나방처럼 덤빈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나는 기말고사 첫날 시험을 치르고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당시에는 김포공항까지 지하철이 연결되지 않았을 때라 하루에 여섯 번만 다닌다는 공항버스를 타고 김포에 갔다. 서울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가려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시간이 오래 걸렸다. 덕분에 일찌감치 도착해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겠다는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공항 도착층에 가보니 장국영이 도착하기 한참 전인데도 이미 앞줄은 꽉 차 있었다. 



장국영의 실제 내한 사진은 아니지만, 당시 내 눈에 보였던 광경과 흡사하다. 실제로는 왕대륙의 내한 당시 사진이라고 [출처 : 이투데이 비즈엔터]


연예뉴스 프로그램을 보면 공항의 입국 게이트가 열리고 그 문 사이로 해외 인기스타가 나타나면 화려한 플래시와 함께 꺅 하고 소리를 지르는 열성팬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은 그게 바로 나였다. 

분위기에 취해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대니 얼결에 함께 소리를 지르고 열광을 하긴 했지만,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장국영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덕분에 게이트를 빠져나오며 손을 흔들던 그 순간을 제외하면 줄곧 그의 뒤통수와 등판만 바라보며 인파에 휩쓸렸던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얼굴을 보았다고도, 보지 못했다고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뭔가가 후루룩 지나가버린 기분이랄까. 실물이 어땠더라, 무슨 옷을 입었더라, 아무리 되새김질해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생각나는 것은 여기저기 밀려다니며 세상 당황해하던 나 밖에 없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의 등판과 뒤통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기까지 가서 대체 뭘 하고 온 것인지..)



그렇게 그를 태운 차량이 광속으로 공항을 빠져나간 후, 나는 그 차를 따라 강남역에 있는 리츠칼튼 호텔로 따라갔다. 강북의 끄트머리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강남의 지리는커녕, 리츠칼튼이라는 이름의 호텔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그날 처음 알았던 나는 호텔 로비에서 괜히 주눅이 든 기분으로 그날 저녁에 기자회견이 예정되어있다는 그를 기다렸다. 로비에는 나처럼 장국영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모여든 팬들이 여러 팀 있었고, 다들 초면이었지만 서로 분주히 정보를 교환했다.


“언제쯤 시작한대요?”


“모르겠어요, 근데 아까 레코드사 담당자가 들어가는 거 보니 곧 시작할 거 같아요. 기자들도 다 들어간 거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뭔가 긴장된 공기가 흐른다 싶더니 좀 전까지만 해도 정답게 정보를 주고받던 팬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나왔다!

나도 달려가는 팬들을 따라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는 기자회견장 입구에서 그의 얼굴을 다섯 발자국쯤 앞에서 보았다. 갑자기 세상이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 모르지만 한 1-2초 정도는 눈이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하다.



와, 세상에.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가 있지?



처음으로 본 장국영의 실물은 실로 엄청났다. 얼굴을 정면으로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저게 장국영이라고?’였다. 세상에 저 얼굴이 사진엔 '이렇게 밖에' 안 나오는 거였나 싶었다.

순간 얼핏 부처님 뒤통수에나 있다는 후광을 본 것도 같은데, 확실한 것은 그때까지 내가 본 얼굴 중에서 가장 입체적이고 완벽한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입체감이었다. 어쩌면 눈과 코와 입이 저렇게 다 자기주장이 강한지. 그리고 동남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생각보다 피부가 검었다. 그리하여 나는 훗날 그 순간의 인상을 “인도 왕자같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 날, 기자회견장에서의 장국영 [출처 : 연합뉴스]



그렇게 기말고사 첫날의 스코어는 먼발치에서 한 번, 약 5분간 뒤통수 감상, 다섯 발자국 앞에서 20초 간 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그 언제보다도 흥분상태였다. 드디어 만났어! 만났다고!!


엄밀히 말하자면 ‘만났다’가 아니라 ‘보았다’가 정확한 표현이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득의양양해서 독서실로 돌아온 시간은 밤 10시였다. 당연히 부모님은 내가 기말고사를 위해 독서실에서 열공하는 줄 아셨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세상 피곤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피곤해서 어쩌니, 마지막 시험이니 조금만 참아라 하는 엄마의 걱정 어린 격려를 받으며 씻고, 간식을 먹은 후, 나는 다음날 시험을 위해 밤을 새웠다. 장국영은 장국영이고, 시험은 시험이고. 당시만 해도 밤샘이라면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에 나는 둘 다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두 과목 혹은 세 과목씩 나누어 나흘간 치러지는 시험의 둘째 날, 과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과목의 개수만큼은 기억이 난다. 모두 세 과목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세 과목 모두 시험 도중에 장렬하게 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선생님들께 섭섭해지는 대목인데, 시험 도중 한참 졸다가 놀라서 번쩍 눈을 뜨면 약속이나 한 듯이 시험감독을 하던 선생님들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 갑작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져서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시험시간에 버젓이 자고 있는 나를 기막혀하며 오래도록 지켜보던 눈빛이었다. 

기막혀할 시간에 좀 깨워주면 어디가 덧나는지. 약속이라도 한 듯 시험감독을 했던 십 수 명의 선생님들 중 나를 깨워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들은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를 한다는데.. 나는 그렇게 낮에는 장국영을 쫓아다니고 밤에는 공부를 하고, 오전에는 시험을 보며 꾸벅꾸벅 졸아댔다.


시험 첫날 공항과 기자회견장까지 다녀왔는데 어딜 또 쫓아다닌 것이냐고? 그 이튿날부터는 사인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은 지오다노가 되어버린 강남역 타워레코드 본점에서, 종각에 있는 영풍문고에서 나는 길고 긴 줄을 선 끝에 그에게 사인을 받았다. 

그에게 악수를 청했던가? 그랬던 것도 같다. 시험 마지막 날 나와 함께 영풍문고 사인회에 와주었던 친구가 제 손을 자랑스레 흔들며 “나 오늘 손 안 씻을 거다”라고 부산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나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날 받은 사인을 지금도 가지고 있으니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그가 내 손을 잡아주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일 텐데 이상하게도 그것보다는 기자회견장 앞에서 보았던 20초 남짓하는 그 순간이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 날 사인받은 [총애장국영] CD.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 생에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결연했던 마음과 달리 1995년의 만남은 장국영보다는 그 시절의 내가 더 기억에 남는다. 처음으로 혼자 물어물어 찾아갔던 공항과 특급호텔,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했던 첩보전 같은 눈치게임, 정작 시험시간에 졸았을지언정 나름대로는 꽤 치열했던 시험 준비...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것은 곧 죽어도 하지 않았던 범생이가 장국영으로 인해 처음으로 첫 일탈을 경험한 것이다.


그 일탈의 결과로 나는 처참하리만큼 내신을 망쳤고, 덕분에 원서를 넣을 수 있는 대학 역시 제한되었다. 만약 장국영이 시험 이후에 한국에 왔다면 내 인생은 조금은 달라져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국영을 쫓아 서울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닌 19살의 결정에는 후회가 없다. 

만약 얌전히 집에서 공부만 했다 한들 눈앞에 장국영이 오락가락하는데 공부가 잘 되었을까 싶기도 하고, 정신승리로 들리겠지만 시험을 잘 봐서 더 좋은 대학에 갔다고 한들 어쩐지 내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 지 않았을 것도 같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의 나는 과거의 선택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진리라 여긴다. 

때문에 설령 그로 인해 다소의 고통(혹은 삽질)이 있었다 해도, 그때의 그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든데 크게 일조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오늘의 나는 그날의 나를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비록 남들 눈에는 이해불가의 한심지사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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