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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희 Oct 03. 2019

風再起時(풍재기시) - 만약, 장국영이 살아있다면

나의 레슬리 ep5 : 내가 사랑한 가수 장국영 (4)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사는 if가 몇 개씩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크고 작은 if가 있다. 집을 잘 못 사는 바람에 꽤 큰 손해를 보았던 탓에 집을 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후회하는 대문자 IF부터 그때 그 다이어트에 요요가 오지 않았다면, 그때 그 남자랑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때 그 회사를 조금 더 다녔더라면 하는 여러 개의 자잘한 if가 있다. 그리고 눈치챘겠지만 그 if 중에는 ‘장국영이 살아있다면’이라는 가정과 상상도 있다.



사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시기는 내 마음이 조금씩 시들해지고 있을 때였다. 더 이상 팬클럽 활동도 게걸스레 자료를 모으는 것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장국영의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그를 애정 했지만 그전까지는 늘 펄펄 끓는 물처럼 뜨겁던 애정과 열정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예 냉랭해진 것까지는 아니고, 너무 뜨거워서 데일 것 같은 온도에서 뜨끈하게 호로록 마시기에 딱 좋은 온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레슬리에 대한 온도가 식기 시작한 것은 더 이상 학생이 아니고 내 몫으로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하는 어른이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평일에 매일 반복되는 야근을 견뎌 내고 나면 주말에는 영화보다 영상회보다, 그 무엇보다도 우선은 잠이 먼저였다. 화장실조차 가지 않고 열몇 시간씩 이어지는 통잠을 딱 두 번 자고 나면 어이없게도 다시 월요일이었다.

어릴 때 주말만 되면 이부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었던 아빠가 왜 그랬는지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장국영에게서 한걸음 떨어져 나왔다. 내 손으로 돈을 버는 대가로 일상에 허우적대는 어른이 되면서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취미와 거리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예전만큼 뜨겁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그의 팬이었다.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조금씩 멀어지긴 했지만 그 대신에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는 장국영을 지켜보는 새로운 기쁨도 알게 되었다.


지금도 한국에서 ‘장국영 머리’라 불리는 후까시를 잔뜩 넣은 헤어스타일을 유행시켰던 그 머리카락의 숱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도 지켜보았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해지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장국영이 숀 코넬리처럼 하얀 머리의 노신사가 되는 날까지의 과정을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의 죽음은 나를 다시 그에게로 한 발자국 더 가깝게 데려다 놓았다. 장국영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그를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그를 어린 시절의 추억 정도로 여길지도 모르고, 환갑이 넘은 장국영의 모습을 보면서도 특별한 감흥을 느끼기보다는 세월의 속도를 한탄하기 바쁠지도 모른다.

내지는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 실망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모든 것이 가정이고 상상이지만 나는 지금도 이따금씩 살아있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닌지 지금은 좀 뜸하지만 한때는 살아있는 장국영을 보았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다.

중국의 계룡산인가에서 보았다는 사람, 태국에서 보았다는 사람.. 장소도 다양하고 그때마다 목격했다는 그의 모습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매번 사진 한 장 없이 “분명히 장국영이었다”라고 우기는 내용의 기사를 볼 때마다 얼마나 기운이 빠지던지.


그즈음에 읽었던 폴 오스터의 소설 <환상의 책>에서 자살을 가장하고 사라지는 한 배우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때는 그렇게라도 그가 어딘가에 살아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정말 그런 거라면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도 좋으니 살아있다는 힌트만이라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我 回頭再望某年

나, 지난 몇 년 간을 되돌아보면


象失色照片 乍現眼前

색을 잃은 사진처럼 나타나는


這個茫然困惑少年

길을 잃고 혼란스러운 소년


願一生以歌 投入每天永不變

그는 평생토록 변함없이 노래로 하루하루 채워나가기를 바랐죠


任舊日路上風聲取笑我

하지만 과거에서 불어온 바람은 나를 비웃네요


任舊日萬念俱灰也經過

하지만 과거의 산산조각 난 기대들 역시 지나간 일이에요


我最愛的歌最後總算唱過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를 결국 부르고 말았어요


毋用再爭取更多

더 이상 싸우고 쟁취할 필요 없죠



風再起時 默默地這心不再計較與奔馳

바람이 다시 불어오면, 조용했던 이 마음은 따지지도 않고 뛰기 시작해요


我縱要依依帶淚歸去也願意

눈물과 함께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좋아요


珍貴歲月裡 尋覓我心中的詩

소중한 세월 속에서 내 마음속의 시를 찾기 위해서..


風再起時 寂靜夜深中想到你對我支持

바람이 다시 불어오면, 조용하고 깊은 밤에 여러분이 보내준 지지를 생각하죠


再聽見吹呼裡在泣訴我謝意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하며 그 환호성을 다시 들었죠


雖已告別了 仍是有一絲暖意

이미 이별을 고했지만, 따뜻함 한 자락은 남아있어요



我 浮沉了十數年

나, 십수 년 동안 부침을 반복했죠


在星空裡閃 帶著惘然

별 빛이 총총한 저 하늘에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請你容我別去前

내가 과거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贈出這闕歌 來日某天再相見

이 노래를 남기고 갑니다, 먼 훗날에 다시 만나요


但願用熱烈掌聲歡送我

그저 열렬한 박수로 나를 보내주기를 바래요


在日後淡淡一生也不錯

이제부터 담담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那暖暖雙手最後可永遠伴我

그 따뜻한 두 손은 나와 언제나 함께 할 거예요


何用再得到更多

더 이상 무엇을 더 얻을 수 있겠어요


* 仍沒有一絲悔意

한 자락의 후회도 없어요




<風再起時(풍재기시/다시 바람이 불어오면)>는 가수 은퇴를 앞두고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가사에서 느껴지듯 은퇴의 소회를 밝힌 곡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국영이 직접 작곡을 해서 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곡이기도 하다. (가사를 보면 작곡보다는 작사를 직접 했을 것 같지만,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https://youtu.be/W5Uo9Pfagt0?t=5816

오랜만에 다시 열어보는 장국영의 은퇴콘서트 엔딩. 30대 리즈시절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이 곡은 당연하게도 1990년 가수 은퇴공연의 엔딩을 장식했다. 2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관중을 쥐락펴락한 장국영은 이 노래를 마지막곡으로 부른 후에 무대를 한 바퀴 돌며 팬들에게 빨간색 장미꽃을 나누어준 다음, 마이크를 무대 한가운데에 남겨두고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그 유명한 고별 콘서트의 엔딩이다.



https://youtu.be/cgrVdZelaFA?t=104

무대에 마이크를 남겨놓고 떠난 지 6년 후, 그는 이런 모습으로 돌아온다. 섹..섹시하다!!


뿐만 아니라 이 곡은 동시에 1996년 가수 컴백 공연의 인트로로 불렸던 곡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에 이 무대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으며, 이 노래의 가사를 조금 바꿔서 불렀다.

"이미 이별을 고했지만, 따뜻함 한 자락이 남아있네요"는 가사 대신에 "오늘 밤 이렇게 또 만났네요, 따뜻함 한 자락이 남아있네요"라고.


그리고 가사를 바꿔부르지 않은 마지막 가사, "仍沒有一絲悔意(한 자락의 후회도 없어요)" 역시 의미심장하다. 은퇴도 컴백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고백으로 들렸다고 하면 너무 오바스러우려나.



이렇게 은퇴와 컴백의 끝과 시작을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뜻깊은 노래지만, 나는 이 노래에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바람에게 계속 불어오라고(히트곡 <風繼續吹(풍계속취)>의 가사) 노래한 곡으로 스타덤에 올랐던 장국영이 “바람이 다시 불어오면”이라는 노래로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또 실제로 돌아온 이후에는 자신이 돌아왔음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 아닐까.

실제로는 다른 의미였을 수도 있고, 별 뜻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늘 그가 바람이라는 단어에 스스로를 비유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언젠가 그가 이 노래를 한 번 더 부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다. 다시는 가수으로서의 모습을 못 보게 될 줄 알았던 장국영이 이 노래와 함께 다시 무대 위로 화려하게 나타난 것처럼, 영영 그 모습을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그가 이 노래를 다시 부르며 나타나는 상상. 내 말도 안되는 상상처럼 그가 정말로 살아있다면 이 노래만큼 완벽하게 어울리는 곡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상상이 절대 이루어질 리가 없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때문에 이건 입 밖에 낸 적은 없는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if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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