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 구름
결혼을 하고 분당 정자동의 어느 아파트에 들어왔을 때, 나는 마치 넓고 텅 빈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조각배 같았다. 분당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버거웠다. 그럴수록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낯선 땅에 익숙함을 만들어 줄 무언가가 간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에 우연히 네이버 카페 맘스홀릭을 알게 되었다. 임신과 육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정자동에 사는 예비맘'이라는 글을 발견했을 때,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도 댓글을 달아볼까? 낯선 이들에게 내 마음을 내보이는 일이 망설여졌지만, 결국 용기를 내어 짧은 글을 남겼다. "저도 정자동에 살고 있어요. 만나 뵙고 싶어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처음 만날 날, 여섯 명의 예비맘이 모였다. 나와 동갑인 친구 셋, 언니 두 명, 그리고 나보다 어린 동생 한 명, 언니 두 분은 이미 딸을, 동갑내기 친구는 아들을 키우고 있었고, 나머지는 나처럼 예비맘이었다. 어색했던 첫 만남은 금세 웃음으로 채워졌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곧 서로의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만남의 횟수는 잦아졌고, 서로의 집을 오가며 육아와 삶을 나누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뒤에는 돌잔치에도 모두 참석했고, 부부 모임까지 할 만큼 가까워졌다. 그 시절, 그들과 함께였기에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낯선 분당 땅에서 그들은 내게 가족 같은 존재였다. 모임의 이름을 정할 때도 우리는 진지했다. 여러 가지 제안이 나왔고, 처음엔 모두 정자동 한솔아파트에 살았기에 '한솔 맘 모임'이 유력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너무 평범하다고 했다. 우리만의 색깔이 담긴 이름을 찾고 싶었다. 그때 동갑내기 친구의 남편이 엉뚱하면서도 재밌는 이름을 제안했다.
"이수만 어때요?"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그...?"
"아니에요. '이번 주 수요일에 만나요.'이, 수, 만."
우리는 폭소를 터뜨렸다. 단순하면서도 센스 있는 이름, 매주 수요일이면 정자동 어딘가에서 모여 수다를 나누고 웃음을 피우던 우리에게 딱 맞는 이름이었다. '이수만'은 그렇게 우리의 상징이 되었다.
세월이 흘렀다. 분당의 집값은 치솟았고, 여섯 명 중 절반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남은 셋만이 여전히 분당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연락을 자주 주고받으며 모임을 이어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의 삶이 바빠졌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하루를 버티다 보니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나는 그 시절을 떠올린다. 정자동의 어느 집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아이들의 돌잔치에서 사진을 찍어주며 서로를 응원하던 장면들, 부부끼리 함께 모여 늦은 밤까지 이야기 나누던 시간들, 그 순간들이 아직도 마음속에 따뜻하게 남아있다.
최근에 문득 기억이 나서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한솔 맘 모임 1차' 공지 메일과, '이수만'이라는 이름을 확정 짓고 주고받은 2차 모임 안내 메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메일 속에는, 그 시절 우리의 온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읽는 내내 웃음이 번졌다. '이번 주 수요일에 만나요.' 그 짧은 인사가 얼마나 큰 위로와 설렘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지금은 각자의 길 위에서 분주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잔물결처럼 남아 있다. 멀리서도 서로의 안부를 떠올리며 마음으로는 이어져 있음을 안다. 분당에서의 삶은 내게 한 지역에서 보낸 시간이 아니었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함께 시간을 쌓아가며 나를 성장시킨 과정이었다. 시간은 흘러도 그 시절의 기억은 물결구름처럼 천천히 흘러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