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 여행의 탐닉

비행기 구름

by 박수진

여행에는 늘 특별한 순간만 남겨야 한다는 강박,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불안, 예전의 나는 그 함정이 늘 빠졌었다. 제주에 간 이번에도 처음에는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마음이 갔던 건 풍경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가에 앉아 음악과 함께, 책을 쌓아두고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가장 솔직한 여행일지도 모른다.


작은 주택 2층 창가, 바람은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시시때때로 들어왔고, 나무 바닥은 따뜻했다. 멀리서 보이는 쉬지 않고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벽에 비춰 보이는 그림자와 저녁 무렵, 창문 너머로 붉은 노을이 스며들었다. 그 순간, 이 하루가 조금은 더 소중해졌다. 여행은 결국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특별해지는 것이 아닐까, 제주에서의 느리지만 깊은 하루를 나는 오롯이 나만의 속도로 살아내고 있었다.


가끔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몸이 지쳐서라기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져 내릴 때가 많다. 그럴 땐 계획도, 긴 준비도 필요 없다. 가벼운 가방 하나 메고, 늘 스쳐지나기만 했던 작은 서점이나 오래전 눈여겨본 카페로 향한다. 하루쯤은 오직 나로만 살아보고 싶다. 누군가 나를 부르지 않고, 무엇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느슨해지고 조금은 모른 척할 수 있는 그 하루가 나를 지탱한다.


여행은 꼭 비행기를 타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시간을 내서 제주로 향했다. 가장 먼 여행은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곳으로 향하는 걸음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루치 여행은 가볍지만 진지하다. 준비가 번거롭지 않고, 돌아오는 길마저 편안하다. 그러나 남는 것은 오래간다. 나는 이 짧은 제주 여정에 은근한 탐닉을 느낀다. 오직 나만을 위해 열어둔 문장 같은 하루, 새콤달콤한 자유가 나를 끌어당긴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지만, 숙소에만 있기에는 아까운 기분이었다. 가방에 책 한 권과 노트를 넣고, 초록빛 텀블러를 챙겼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더없이 가볍다. 굳이 이유를 만들 필요도 없고, 발길 닿는 대로 걷고, 멈추고, 머무르면 된다. 해가 넘어가는 찰나에 제주 서쪽 밭 너머 하늘에 비행기 모양의 구름이 떠 있었다. 그날 제주 하늘에 흘러가던 비행기 모양의 구름처럼, 내 마음에도 작은 흔적이 남았다. 흩어져 있던 마음이 조금씩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하루치의 여행은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분명히 머물렀던 순간, 나는 기억 하나로도 충분히 단단해진다. 하루치의 여행의 장점은 확실하게 오래도록 남는다. 잠시 쉬고 싶은 곳에서 익숙한 나를 쉬게 두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또 다른 하루치 여행을 꿈꾼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