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날의 두 가지 맛

by 박수진


잠을 잘 못 자는 날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작은 소리에도 깨고, 엎드린 이불 위에 흩어진 먼지 하나에도 신경이 쓰인다. 이유 없이 울컥하는 감정과 흐르는 눈물이 있다. 이런 날 아침이면, 오늘 하루는 어떻게 버틸까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 차가운 슬픈 감정이 퍼진다. 그럴 때면 나는 늘 같은 걸 떠 올린다. 그린티와 자모카 아몬드 훠지 아이스크림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대학생 때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면 꼭 두 가지 맛만 고른다. 작은 컵사이즈 일 때도, 하프갤론 사이즈를 사서 냉동실에 넣어둘 때도, 늘 그 두 가지 맛이다.


그린티는 진한 연두색, 자모카훠지는 커피와 아몬드, 초콜릿이 섞인 단맛이 깃든 옅은 갈색이다. 두 가지 맛은 색도 다르고, 혀에 닿는 맛도 조금 다르지만, 나에게는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 늘 그 두 가지 맛이 세트다.


그린티맛은 마음이 아주 가라앉아 있는 날에 도움이 된다. 뜨거운 차로 마실 때와는 또 다른 그린티 맛이다. 자모카훠지는 슬픈 기억이 있을 때 함께 먹으면 딱 좋다. 그 기억이 무너지지 않도록, 적당한 단맛으로 덮어준다. 커피 향이 있는 초콜릿, 살짝 녹은 자모카훠지는 입안에서 살살 녹여가며 오래 천천히 먹는다. 한 숟가락 먹고, 눈을 감고, 또 한 숟가락 먹고, 지난 일들을 천천히 떠올린다. 억지로 잊으려고 하지 않고, 차라리 가만히 들여다보는 거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슬플 때는 술을 먹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무조건 맵고 뜨거운 음식을 먹어야 마음이 풀린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얼음이 들어간 커피도 아니고, 바로 그 두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이다. 혼자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주문을 기다리는 그 몇 분 동안에도 사람들 목소리와 냉장고 돌아가는 작은 기계 소리와 아이스크림을 덜어내는 스쿱 소리가 들리고, 모든 작은 소리를 생각한다. 한참을 그렇게 생각하다가, 또 생각났다. 청소년 시절, 엄마랑 함께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던 기억이다.


엄마는 늘 딸기맛과 호두맛을 고르곤 했다. 나는 그때도 그린티와 자모카훠지였다. 어린 나이에 그린티맛을 좋아한다고 하면 어른들이 신기해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린티의 색깔이 이상하게 좋았다. 어른인 척하는 기분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그린티의 맛이 좋았다. 엄마는 늘 딸기 아이스크림 위에 작은 우드 스푼으로 한 숟가락을 떠서 내 입에 넣어주곤 했다. 나는 딸기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엄마가 주는 건 가끔 받아먹었다. 그러고는 다시 내 컵에 있는 그린티와 자모카훠지를 떠먹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도 아마 가끔 잠을 못 잤을 것이다. 엄마는 그런 내색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런 날도 있었겠지. 그리고 그런 날, 엄마와 나 우리 둘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간 거였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역시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채 일어났다. 슬픈 마음은 여전히 울컥하게 만들고, 눈은 무게를 한 짐 진 듯 무겁다. 이상하게도 이런 날, 평소보다 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 마음의 허기가 그대로 몸까지 내려오는 것 같다.


아이스크림 매장 안으로 들어가 익숙한 아이스크림 맛을 찾아, 유리 너머로 그린티와 자모카훠지를 먼저 눈에 담아둔다. 아이스크림 스쿱을 긁는 소리, 플라스틱 뚜껑 닫는 소리 그런 작은 소리들이 집으로 가기까지의 나를 버티게 해 준다. 집에 돌아와서 냉동실 문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넣는다. 그리고는 작은 유리볼을 꺼내서, 그린티 한 스쿱, 자모카훠지 한 스쿱을 덜어 담음새 있게 담아낸다. 식탁에서 천천히 한 숟가락씩 떠서 입안 가득 퍼지는 그린티맛과 그리고 단맛, 입안에서 느끼는 차가움과 따뜻함이 마치 어느 한 계절의 그늘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슬픈 날에는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힘들다. 그 슬픈 마음도, 이 두 가지 맛과 함께라면 잠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제를 조금은 다정하게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도, 그리고 아마 내일의 나도, 그린티와 자모카아몬드훠지를 천천히 떠먹으며, 그 두 가지 맛 사이에서 마음을 천천히 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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