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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마르스 Aug 01. 2021

불안들 - 이용한

2021 시필사. 208일 차

불안들 - 이용한


웃는 표정을 걸어놓고 나는 울었다


심란한 구석에 손목을 내리고

문득 멸망한 유물론자처럼 앉아 있어요

저녁은 친절하고, 사월은 불길하니까

환하게 염불을 외며

교양 있게 슬퍼하는 거야

미쳐도 곱게 미치는 거지

들어오세요, 앉으세요

심장이라도 내어드릴까요 아니면 이 낡은 머리라도

이제 곧 첫눈이 내리겠지

꽃밭이 하얗게 얼어붙겠군

소년과 겨울이 뒤엉킨 뒤죽박죽의 계절들

붉은색 원숭이가 걸린 방에서

나는 삭제되었습니다, 라는 문장을

한번 더 삭제하고

보세요, 여기가 이미 바닥이에요

뛰어내릴 수도 없는 반지하 창문에 박힌 노란 달

달 하나에 한숨과

달 하나에 아버지


이 세상은 모든 아버지들이 망쳐놓았죠

요컨대 내가 아버지라는 게 가장 무서워요

아버지인 내가 시를 쓰고, 물을 마시고, 숨을 쉰다는 게

도망가지도 못하는 아내가 던지고 간

작고 하얀 알약을 삼키며

무수히 늦은 나를 잡아당기며

좀더 왼쪽으로, 무엇의 왼쪽인지도 모르고

버려진 자전거처럼 모로 누워

잠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죠

눈을 감았다 뜨면 내일이 올 것 같아서

알아요, 이미 새벽이라는 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목요일이라는 거

불면을 건너면 불안

죽고 싶은 것과 살고 싶지 않은 것은 달라요

둘 사이의 공백을 견디는 게 삶이죠

약을 먹으면 인생은 다시 좋아질 테지만

가능성이란

불가능한 광년 너머에나 있는 것

보세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구름이

방안에 가득해요


그저 나는 조금 흐린, 이라고 쓴 뒤

더욱 흐릿해진다, 숨죽인 숨결처럼.


#불안들 #이용한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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