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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민 Dec 17. 2019

우울한 잡념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안 전체를 기시키며 바닥 청소를 하다가 울컥했다. 한 움큼 잡아 누른 감정을 다시금 집어삼키며 커피를 내려 마시니 이내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실 머릿속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해왔지만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버티고 또 견뎌왔다. 죽음에 대해 커진 나의 마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치닿고 있었다. 그 끝이 어디일지 무섭게, 속된 말로 미친년 널뛰기하듯 제멋대로라서 스스로조차 무서움을 느낀다. 요즘은 이성이 마비된 것처럼 감정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 


 사실 나는 중증 우울증 환자이다. 누군가에게 쉽게 고백할 수 없는, 고백하지 못할 기생충 같은 감정이다. 그런 내가 이렇게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는 이유는 살고자 함이다. 나는 죽으려 했었고, 어떻게 하면 죽어버릴 수 있을까 고민했던 사람이며, 살아있는 것이 너무 괴로워 언제고 죽을 수 있다면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내게 죽어줬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내뱉어준다면 예전처럼 금방이라도 시도할 것만 같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두렵다. 이런 이중성 짙은 감정 또한 혼란스럽다. 죽고 싶다 하면서 실행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극과 극의 마음이 나를 더욱 어지럽힌다.


 내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는 오직 하나, 남겨질 가족들이 받을 상처와 특히 나의 분신, 나의 아이에 대한 죄책감- 오직 그뿐이다. 상상조차 못 할 아픔을 떠 안겨줄 순 없기에 살아야 한다고, 어떻게든 주어진 명까진 살아남아야만 한다고 머릿속으로 되뇌고 세뇌시켜왔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세뇌가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다. 마음 한편에 선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그만 일 텐데 내가 굳이 애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책임감이라는 족쇄는 나를 더욱더 옥죄고 있다. 행복감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갔다. 스스로를 감정의 지옥 속으로 떠밀어버린 셈이다. 온전한 자신을 마주했을 때 상처 하나조차 감싸줄 자신이 없다.


 부모님의 얼굴을 찾아뵙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정신을 차렸다가도, 이내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돌보다 일을 나가기 위해 차를 타고 나오면 어느새 다시 죽음을 맞이하길 바라는 나의 모습이 이중적이라 거부감이 밀려왔다. 나는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이미 지나간 의문들이다. 그저 쉽게 빨리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게 알고 싶을 뿐이다.


 병들어버린 나를 마주하게 된 계기는 애석하게도 아이와 남편을 바라볼 때였다. 충격적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느 순간 점점 지쳐갔는지도 모른다. 행복하고 안정감이 느껴져야만 할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하면서 살아왔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나만 바라보는 아이의 애정 어린 눈빛에 칠흑 같은 어둠의 눈빛을 담아주었다. 아이의 눈빛마저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죄책감이 나 자신을 짓누르고 그걸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나의 모자람과 이중성에 아이도 시들어가고 있을까 봐 두렵다. 나의 불행이 오직 나만의 불행으로 끝나버렸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단 걸 알아서 더욱 괴롭다.


 수많은 의사들을 만나봤다. 그들은 하나같이 얘기한다. 햇빛을 쬐며 걷고 일정 시간 규칙적인 운동을 하며, 신경이 곤두설 땐 주저하지 말고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거나 깊은 수면이 며칠 째 이루어지지 못하면 수면제를 복용해서라도  충분히 잠을 잘 수 있도록 하라고.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해 운동에 매달려도 봤고 애써 취미생활을 만들어보기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려 노력했으며, 여태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은 적은 단 하루로 없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건강을 잃었다. 아이를 낳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본 날이 손에 꼽힌다. 잠의 깊이는 얕아지다 못해 잠을 자도 매일 정신이 깨어있는 상태와 다를 바 없는 수면 시간이 반복된다. 이럴 바엔 자다가 심정지로 죽어서 영원히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10대부터 지금까지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던 적은 손에 꼽힐 것이다. 의지가 약해서였을까, 아니면 너무 어릴 적부터 존재에 대한 부정을 직간접적으로 접해서였을까. 사랑을 주고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나는 어디에서도 섞일 수 없었던 불순분자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늘 독특했고, 이질적이며, 평범하지 못 한 사고가 마찰을 빚어내며 그러한 삶이  지속되다 보니 여기까지 온 듯하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를 바란 적이 없는데 모두가 나를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긍해야만 했고, 괜찮다는 대답이 정해져 있었으며,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그것이 세상에 적응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 않은 나는 결국 정신이상자, 불순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리니 나는 굴복을 택해왔던 것이다.


나는 결국 전과 다를 바 없는 정신병자인 걸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망가져 온 것일까.
살아있는 것을 견뎌야만 하는 것인가.
앞으로 이렇게 계속 버티는 것만이 답일까.
모든 것이 거짓말 같은 나의 삶에 쉼표가 찍히긴 할까.
이젠 이유도 없는 우울감에 감염된 느낌이다.
이 우울이 나를 잠식시켜버릴 것만 같다.



......




 언젠가 아이가 훌쩍 커버려서 이런 나로부터 자연스레 멀어지게 될 쯤엔, 비로소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 있을 거라 희망하며... 하루를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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