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민 Nov 29. 2016

4반의 불효녀

왕따 인생 - 2


 열 두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세 개의 동이 한 단지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거실이 꽤 넓었기에 부모님께서는 자식같이 여기시던 식물들을 잔뜩 키우셨고, 햇빛이 잘 들어서 거실 베란다는 작은 화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부터 키웠던 사랑초는 제주까지 내려와 20년째 부모님 곁을 지키고 있다. 현관 옆의 한 쪽 벽면에 설치했던 전신 거울은 우리집 런웨이를 방불케 했던 엄마의 작품이었다. 외출할 때 나홀로 패션쇼를 하다 지각하게 만드는 요물단지였지만 우리 가족은 전신 거울을 굉장히 사랑했다. 새 집으로 이사를 간 설렘만큼 새 학교와 새로 만날 친구들에 대한 기대감도 덩달아 커졌다.


 며칠 후 엄마의 손에 이끌려 끝 자리가 4로 적힌 반 앞에 서있게 되었다. 숫자에서 오는 불길함이 있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교실 안으로 발 걸음을 옮기는데 내 쪽으로 몰리는 수많은 눈동자들에 현기증이 일어날 것 같아서 이내 참지 못 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시켰다. 가까스로 인사를 마치고 가장 뒷 자리에 도망치듯 앉았는데 피식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내 뚱뚱한 몸 때문일까 싶어서 숨기고 싶은 마음에 가방을 꽉 끌어 안았다. 시력마저 너무 안 좋아서 동그랗고 두꺼운 안경까지 썼는데 무슨 매력이 있었을려고.


  며칠은 그럭저럭 잘 견뎌냈고, 몇몇 친구들과도 통성명을 하게 되면서 나름 수월한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합창부에 들어가면서 다른 반 친구들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단짝 친구도 생겼다. 2학기가 되어서는 학급 부반장이 되었고 시끌벅적한 하루하루가 즐겁기도 했다. 6학년이 되어서도 2년제 덕분에 그 반 그대로 학년만 바뀌었고, 반 친구들 그대로 변함없이 잘 지내었다. 일년은 정신 없이 지나갔지만 그 행복이 그리 길지만은 않았다.


 반에서 제일 키가 큰 여자 아이 둘이 있었다. 둘 다 성과 이름이 특이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소위 말하는 학급 내 권력자들이었는데 둘의 말 몇 마디면 남자 아이들까지도 껌뻑 기가 죽을 정도였다. 그 둘의 눈 밖에 나면 왕따를 당하는 위험이 있었고, 나는 결국 그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었다. 당시에 아주 나쁜 문화가 유행했는데, 그게 바로 돌림따였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한 두 달을 왕따시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무시하고, 협박하고, 놀림거리를 만들고, 자존감을 파괴시켜버리는 따돌림.


 울기도 많이 울었고, 일일이 전화를 걸어 사정도 해보았지만 절대 진심은 닿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용돈으로 사달라는 것들을 사서 갖다 바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었다. 나는 살기 위해 부모님께 가장 불효를 했다. 퇴근 후 아버지께서 씻고 계신 틈을 타 아버지 지갑에서 몇 만원 씩 꺼내어 갔다. 다른 반 권력자들과 연계되어있던 그들의 목적은 결국 돈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영화에서만 보던 일이 내게도 벌어진 것이었다. 손이 덜덜 떨리던 날들도 잠시, 나는 과감해져야만 했다. 그렇게 좀도둑같이 일주일에 두어 번을 아버지의 뼈를 깎고 피를 말린 그 지갑에 손을 대었다.


 꼬리가 길면 반드시 잡힌다고, 나는 아버지께 현장 발각 되었다. 사실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 지갑에서 돈이 술술 빠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 범인이 나라는 것도 알고 계셨지만, 사정이 있을거다 생각하고 눈을 감아주셨는데 액수가 커질 수록 더는 지켜보고 계실 수 없었던 것이다. 호통을 치는 아버지와 걱정스런 눈빛으로 지켜보는 엄마 앞에 무릎을 꿇고 몇 시간을 아무 말이 그저 울기만 했다. 왜 그랬냐고 물으시는 아버지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왕따를 당해서 돈을 뜯기고 있다는 그 사실을 아시면 치욕스러워 하실까봐서, 가뜩이나 다른 일로도 걱정이 많으셨던 부모님인데 나까지 보탤 순 없었으니까. 결국 더 한 보탬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바지 끝을 부여잡고 펑펑 울면서 제발 나를 때려달라고, 차라리 나를 미친듯이 때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살면서 그렇게 속을 썩인 딸에게 단 한 번도 손찌검을 해보신 적이 없는 아버지께서 나를 때리실 리 만무했다. 그저 진실을 알고 싶어하셨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셔도 욱 하시다 이내 꾹 참으시는 게 눈에 보였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저 식물들 사이로 차라리 내 몸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결국 말을 못 했던 내게 엄마가 울면서 방으로 끌고 갔다. 나는 참지 못 하고 말해버렸다.


엄마, 나...왕따야.


 그 한 마디를 하고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부모님의 보호 속에 학교를 가지 않았다. 엄마는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고, 나는 통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다, 알고싶지도 않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 새 초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왔고, 단짝 친구라고 생각했던 그 친구와는 다른 중학교로 배정 받으면서 연락도 끊겨 버렸다. 다른 반에서 내게 돈을 갈취해 갔던 여자 아이들 무리는 경찰서를 드나 들었단 소식 하나를 듣곤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정신 차리고 보습학원에 다니며 공부라는 것에 열중했고, 나를 왕따시켰던 여자 아이와 같은 여중에 다녔지만 다른 반이었기에 마주칠 일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더 기가 센 아이들이 모인 곳이 여중이라 그랬는지 그 여자 아이는 그닥 활개를 치고 다니진 않았던 것 같다. 교칙이 워낙 엄격했던 사립학교여서 선생님들께서도 반 아이들 관리에 혈안이 되어있었기에 불량서클에 가입된 게 아닌 이상, 왕따를 당하는 일이 적었다. 하지만 행복을 성적순으로 매기는 그 학교에서 나는 두통으로 자주 양호실에 누워있었고, 부모님의 걱정은 날이 갈 수록 커졌다.


 공부에 치여 살며 전교 10등 안에는 들어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것을 고작 열 네살의 나이에 뼈저리게 느꼈던 나는 일년 간의 중학교 생활을 마치자마자 호주로 돌연 유학을 떠났다.


 어쩌면 가지 말았어야 했을 지도 모르는 먼 타지로.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감을 견디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