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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민 Nov 17. 2016

우울감을 견디기

불편한 손님, 육아우울증


달갑지 않은 손님이 불쑥 찾아 와 내 속을 갉아 먹는다.

 육아우울증

요즘 나의 상태를 표현 하기에 아주 적합한 단어란 생각이 든다.



 나 하나도 감당 못 하는 처지에 애 엄마가 되어서는, 전에 누렸던 자유는 온 데 간 데 없이 육아라는 쇠사슬에 묶여 자유를 갈망하는 꼴이라니.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육아와 집안일에 치여 커피 한 잔의 여유로움 따위도 사치가 되어버린 내 신세가 갑자기 처량하게만 느껴진다.


 전쟁같은 아침은 아이의 짜증섞인 칭얼댐으로 시작된다. 눈꼽도 채 떼지 못 한 나의 모습은 그야 말로 가관일 것이다. 거울 앞에 서지 않으니 확인할 일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안 보는 게 상책인 지 오래이다. 보면 화딱지만 날 게 분명하니까.


 온몸에 푸석함이 차오르는 느낌과 아침의 쎄한 공기를 마주할 새도 없이, 손과 발의 감각만으로 기저귀의 위치를 파악해낸다. 희안하게도 기저귀를 갈아주고 나면 세 번 중 한 번 꼴로 변을 본다. 배고프다고 난리치는 와중에 아이의 엉덩이를 씻기고 나면 한숨이 절로 난다.


 아이의 밥상을 차려주고 나면 먹이기도 바쁘다. 숟가락질이 아직 서툰 아이에게 뜨거운 밥을 후후 불어 넣는 과정도 우리 둘에게는 그저 인내의 시간이다. 빨리 밥을 입에 넣어 달라고 짜증을 내는 아이의 인내, 그 아이의 짜증을 받아내야만 하는 나의 인내.


 두 사람 모두 인내하는 시간-


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견뎌내야만 한다이성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열불나는 속을 참을 인 백 번으로 다스려야만 한다.


 여기저기 떨어진 밥풀만 봐도 밥 맛이 뚝 떨어진다. 그래서 나의 아침은 늘 빵에 커피다. 가끔 정신이 온전한 날엔 달걀후라이도 부쳐 먹는다. 그 날은 내 위가 계 탄 날이겠지.


 아이가 3주간 폐렴, 장염, 열감기까지 3단 콤보로 아팠다. 집에만 있으면 미치는 에너자이저 아들내미를 3주간 집에 데리고 있어야 했던 나는 거의 반 미친 여자가 되었다. 엄마의 감정받이가 됐을 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에 휩싸여 밤마다 쓰린 속을 잡고 울었다. 아이의 고열이 일주일 가까이 지속되면서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 졌고, 그로 인한 수면 부족이 내 우울감을 배가 시켰는 지도 모른다.

 음주가무나 담배와는 거리가 멀고 제대로 신나게 놀 줄도 몰라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을 아직까지도 찾지 못 했다.


결혼 전 내 별명은 '직진녀'였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는 몇 시간이고 걷고 또 걷는 게 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사람 구경 하는 게 좋았던, 시간 제약 없이 세상 구경 하는 게 제일 행복했던 그 때의 내가 그리워진다.


 아이가 자주 아프다 보니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되어 버려서 일을 할 엄두도 내지 못 한다.



 올해 4월, 커피에 미쳐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바리스타 학원 오전반에 등록해서 열심히 공부하며 바리스타 2급 자격증까지 땄는데,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라떼 기초반에 등록하니 아이가 폐렴에 걸렸고, 곧 입원까지 하게 됐다.


내가 무언가 하려 하면 머피의 법칙처럼 아이가 아팠고, 나는 아직까지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 했다.


 내 모성애가 이리도 하찮을까 싶어서 자책도 해보고, 주변 선배맘들에게 추천 받은 육아서적도 읽어 보며 스스로를 달래기도 해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럴 수록 내 자신이 더욱 초라해졌고,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자괴감만이 나를 맞이할 뿐이었다.


 엄마라는 자리의 무게를 견디기에 나는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는 걸 안다. 알아도 달라질 것은 없다. 일말의 책임 의식을 가져서라도 나는 엄마라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

하기 싫어도 해야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육아를 통해 깨닫고 있는 요즘, 나는 매일 우울감을 견뎌낸다.


온몸으로 버텨낸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뿐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직 이 우울감을 극복해 내기엔 내게 주어진 일들이 여전히 버겁게만 느껴지니까. 나의 자유 의지는 깊이 잠들어 있다 치부해 버리면 그 뿐이다. 이런 몹쓸 자기 합리화 속에서 견뎌낸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면, 언젠간 내게도 바닥을 치고 솟아오를 의지가 생겨나겠지, 라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오늘도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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