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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민 Nov 21. 2016

기억의 상대성

상처는 받은 사람만이 기억한다


 얼마 전 악몽을 꿨다. 10년도 넘은 기억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질 못 한건가 싶어 실망감이 컸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을 깬 내 모습에 옆에서 뉴스 기사를 읽으며 잠 못 이루고 있던 남편이 토끼 눈을 하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악몽이라도 꿨어?


 나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 여자 꿈꿨어.



 남편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되물었다.


또? 에휴...이리와 재워줄게.


 남편은 내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곤 아들을 재우듯이 계속해서 토닥여주었다.


괜찮다...괜찮다...괜찮다...


 엄마의 자장자장처럼 남편의 반복되는 괜찮다 소리에 다시 잠을 청하였다.


 십여년도 더 흐른 세월, 기억은 상실되지 않은 채 잠재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듯 하다. 사람의 상처라는 게 이렇듯 지워야지 해서 쉽게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다시금 깨달았다.


 다음 날 남편과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다 전 날 밤 악몽을 꾼 게 생각나서 먼저 말을 꺼냈다.


언제쯤 그 기억들 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죽어서 무덤까지 갖고 가야하나. 그럼 너무 슬플 것 같은데.


 남편은 무언가 권유하는 눈빛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당신이 그 기억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져야 돼. 용서가 안 되면 그냥 또 악몽을 꿨구나, 하고 넘기고. 그렇게 유연해지지 않으면 스스로가 너무 괴롭잖아. 상처 준 사람은 기억도 못 하고 있을텐데. 아마 그 사람은 기억 자체가 없을걸.


 그렇다. 상처 준 사람은 기억도 못 하고 있을 것을. 이렇게 상처를 받은 사람만이 기억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그게 반복되고. 결국 나 혼자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쳇바퀴 돌듯 나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어떤 상처를 누구에게 받았는 지 속 시원히 말할 수 없는 것도 답답할 노릇이지만, 그 상처가 마음에 주홍글씨처럼 새겨져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비참하다.


 며칠을 밤 잠 못 이루며 뒤척였고, 핸드폰 시계의 숫자가 믿기지 않아서 눈을 비벼대길 반복한 생활이 이어졌다. 피곤이 쌓일대로 쌓여서 신경만 예민해지고 카페인 없인 아이를 보는 게 버거워질 정도가 되었다.



 도대체 그 따위 악몽이 뭐라고 내 삶이 이렇게 피폐해지는가 싶어서 집안일도 미루고 낮잠이라도 자자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심한 이명이 덥쳐서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팔자 좋게 낮잠 좀 자보려나 싶었는데 그 마저도 안 되니 일어나서 또 커피를 들이켰다. 거실에 널브러져 있던 아이의 흔적들을 바라보다가 낙서로 가득한 스케치북에 눈길이 멈췄다.


 아이가 무심코 그렸을 삐죽삐죽한 선들이 모난 내 마음을 보여주는 듯 했다. 나는 그

위로 욕을 써내려갔다가 이내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상처를 지울 수 없으면 직면하는 매 순간 욕이라도 지껄이고 침이라도 내뱉어버리자. 그렇게 온갖 불순물들을 토해내다 보면 언젠간 유연해질 수 있겠지.


 상처가 아무는 데에 사람마다 걸리는 시간은 다를 것이다. 나처럼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그 시간이 길 수도 있고. 나만 붙잡고 놓지 못 한 이 상처의 기억도 살다보면 어느새 희미해져 갈 수도 있겠지.



 차분하게 제정신으로 돌아온 지금, 씁쓸하게도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겠지만 기억하지 못 할 거라는 것. 나도 그 여자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소름끼치게 무섭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과거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고, 그 기억을 까마득하게 잊었거나, 기억의 파편조차 없을 수도 있기에. 내 상처에 대해 더 이상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불평을 토로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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