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민 Jan 14. 2017

자유부인의 날

오늘 하루




 다음 주 목요일부터 주말까지 남편은 출장이 있어 섬을 떠나 육지로 갈 예정이다. 나는 일주일 전인 오늘, 남편으로부터 큰 선물을 미리 받았다. 이름도 거창한 '자유부인의 날'.


 그래도 혼자 아이를 볼 남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에 주말마다 가는 농구를 꼭 다녀오고난 뒤 바톤 터치를 하자 일러두었다. 그래야 미안함이 덜 할 것 같아서. 울트라자이저 아들내미와의 하루를 보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남편의 자신만만함에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오후 12시가 되었고, 나의 발걸음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벼웠다. 며칠 전 미리 예약해 둔 미용실에 가서 뿌리볼륨펌과 클리닉을 받았다. 얼굴에 엉망진창 그림을 그려 나갔는데, 나름 화장한다고 했지만 미용실에 비치된 큰 거울 속 내 모습이 영 어색해서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쳐다보았다.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먼 나는 볼륨매직이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 때도 긴 생머리가 관리하기 편해서 묶지도 않고 다 풀어헤치고 다녔는데, 아이를 낳고 남편만큼 짧은 헤어스타일로 자르고 나서는 짧은 머리가 관리하기 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긴 머리를 되찾기 위해 애써온 결과, 2년만에 간신히 어깨를 덮을 수 있게 되었다.


 클리닉을 위해 빗질을 받는 내내 머리결의 손상도가 심하다는 것을 알았다. 각기 댄스를 추듯 고개가 삐그덕 삐그덕- 머리 엉킴에 주춤, 험난한 시간이었다. 아프단 소리를 내뱉기엔 부끄러움이 먼저 앞섰다.


 좋은 서비스를 받고 나니 뭔가 기분전환이 되면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설렘이 마음 속에 쑥 밀려들어 왔다. 신의 손길을 거친 감사함인걸까.


 역대급 한파로 춥디 추운 이 날씨에 어떻게든 자유를 만끽하고자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칼바람에 뺨을 몇 대고 맞은 듯한 느낌에 정신이 아찔했다. 머리는 두 동강 나듯 시렸고, 어디 들어가서 배를 채워야만 할 것 같았다. 시야에 들어온 분식집은 사막 위의 오아시스- 올레!



 떡볶이와 꼬마김밥, 그리고 서비스인 어묵 국물은 환상의 조합일 수밖에 없었다. 여행지의 이방인처럼 행동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했고, 촌스럽기도 했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나서 온 몸에 온기가 퍼지니 그제서야 추위가 조금 가신 것 같았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먹는 게 남는 거란 생각에 뿌듯했다.


 올 블랙 패션에 신발이 흰 운동화인게 조금 거슬렸다. 사실 이건 그냥 핑계고, 얼마 전부터 검은색 첼시 부츠를 너무 사고 싶었는데 신발만큼은 직접 신어보고 사야한다는 주의라 나온 김에 근처 여러 옷 가게를 둘러보았다.


 현금으로 하면 5천원 할인이었지만, 지갑마저도 짐이라 생각하는 애엄마에게는 단돈 1원조차 없는 대신 간편한 카드 한 장 뿐이라, 소소한 횡재수를 놓쳤다. 하지만 로맨틱한 오늘, 장사 잘 되시라는 의미로 새 아이템을 발에 장착하고 나왔다.



그렇게 장만한 앵클 부츠. 무광이라 그런 지 더 마음에 든다.


 그런데 나오니 막상 갈 데가 없었다. 친구와는 서로 시간대가 맞지 않으니, 그야말로 갈 곳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집에 터덜터덜 왔건만 주차장에 우리 차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보니 아이를 데리고 회사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한량같이 신나야할 사람은 나인데, 남편이 더 부럽게 느껴지는건 뭔지.


 이렇게 집에 들어갈 순 없었다. 그러기엔 오늘 하루가 너무 아까웠다. 생각보다 잘 먹은 화장도 아깝고, 새 신발로 뜀박질이라도 할 수 있는데 제 기능을 못 해서 아깝고, 떡볶이와 김밥이 아직 소화가 안 되서 에너지 소모를 못 한 것도 아깝고, 하다하다 모든 게 다 아깝단 생각이 들고 있는 이 시간이 아깝고!


 갑자기 포털사이트로 검색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편한 의자가 있는 조용한 카페 구석에 박혀서 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자마자.


 제주대학교 가기 전 숲이 어우러진 곳에 자리잡은 한 카페를 발견했다.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잔잔한 음악이, 아늑한 인테리어가 온 몸을 나른하게 해주었다.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내가 평소와는 다르게 수제 과일차라고 쓰여 있는 곳에 눈길이 멈추었다. 색다른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무의식적 끌림이었나보다.



 레몬차와 레몬마카롱을 주문하고 나서 키보드를 꺼냈다.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다. 따뜻한 차를 한 입 머금고 나니 탁월한 선택을 했단 생각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코 끝을 찌르는 레몬의 시큼한 향, 새콤달콤함이 입안에서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이 여유가 진정한 자유지.


 후회 없이 보낸 자유부인의 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혼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