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간만에 친정부모님을 뵈러 즐겁게 시골길을 달렸다. 제주는 만연한 봄의 기운이 곳곳에 퍼질 정도로 꽃망울들이 올라왔고, 언제 겨울이었냐는 듯 따뜻했다. 괜히 한 겨울용 코트를 걸치고 나온 것이 후회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남편은 이틀 연속 회식으로 밤샘이 예약되어 있어서 친정에서 지내다 오는 것에 개의치 않아 했다. 아이와 마음 편히 지낼 곳은 이 섬에서 친정부모님 댁 뿐이고, 그것에 무한히 감사하는 나로서는 안 자고 갈 이유도 없었다.
아이는 책장의 책을 장난감 다루듯 헤짚어 놓았지만, 부모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운 손자일 뿐이었다. 속 된 말로 마르지 않는 '까임 방지권' 소지자이다.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시간을 보내다 아버지께서는 토익과 토익스피킹을 다시 공부하려는 나에게 책 한 권을 건내시며 가슴 아픈 이야기를 툭 내뱉으셨다.
"나는 영어에 트라우마가 있어. 아주 큰 트라우마. 다들 몰랐겠지만, 나는 영어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 했어."
존경해 마지 않는 아버지 입에서 영어 트라우마라니! 엄마와 나는 굉장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 세대만 해도 개천에서 용 난다는 서울대 수석 입학생이신 아버지께서 영어 트라우마라니. 가당치도 않을 말이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란 느낌도 들었다.
아니다 다를까, 내가 짐작한 이유와 딱 들어맞았다.
"우리집은 너무나 가난했는데 형제만 많아서 형들이 물려준 책을 달력지로 싸서 들고다녔어. 그 당시에는 창피해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게 책을 살 수도 없을 정도로 가난했으니까. 다 물려 쓰고 얻어 입고 했지."
이를 악물고 독하게 공부에만 매진하셨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새 학기가 되서 영어시간에 역시나 헌 책을 가져갔는데 선생이 나를 막 나무라는거야. 헌 책을 가져왔다고. 미친듯이 욕을 퍼붓더라니까. 그래서 한 시간 내내 수업도 안 듣고 엎드려서 울기만 했어. 그런 선생이 내 중학교 3학년 담임이었어."
순간 욱 하고 치밀어 오르면서 화가 솟구쳐 올랐다. 아니, 가난도 죄라면 이 험한 세상을 그 어린 중학생이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 같잖은 것도 선생이라고.
왜 대들지 못 했냐고, 그럼 당신께서 돈 들여 새 책을 사주시던가요, 왜 그런 말 한 마디 못 꺼냈냐고 진정이 안 되서 되물었다. 씁쓸해하신 아버지께서는 당시에 선생은 곧 하늘이었다며 교권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는 설명을 덧붙여주셨다. 엄마도 옆에서 덩달아 끄덕이며 그 때는 현재와 달라서 선생한테 대드는 그 순간 두들겨 맞고 퇴학 당했을 거라고 말을 보태셨다.
"곱게 정학도 아니었을걸. 흠신 두들겨 맞고 팔이나 다리 하나는 부러지고 퇴학 당해도 당했을거야. 우리 땐 그랬어."
너무 몰상식하고 불합리적이라 뭐라 더 할 말도 없었다. 말을 잃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정적이 흐르다가 나는 이내 의문이 생겼다. 틈틈히 영자 신문을 읽으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럼 어떻게 공부하셨는지 궁금해졌다.
아버지의 답은 명쾌했다.
"나중에 대학에 가려면 영어를 무조건 해야되는 거더라고. 그래서 그냥 교과서를 달달 외워버렸어, 통째로. 그렇게 책을 몇 권 통으로 외워버리니까 나중에 내가 외운 것들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틀린 문장이겠거니 했고. 그 다음엔 패턴이 생기니까 조금씩 이해를 하게 됐어. 그렇게 무식하게 했지, 뭐. 별 다른 방도가 없었어, 그 트라우마가 너무 오래 가서."
난 외우는 것도 버겁던데, 어떻게 저런 아버지 밑에서 나같은 자식이 나왔지, 그것마저도 의문이었다. 한 때는 아버지랑 너무 다른 나의 두뇌를 통해 의심도 했었다. 나는 정말 주워온 자식일거야, 하다가도 붕어빵같이 닮은 얼굴과 성격의 반은 아버지 딸임이 자명했다. 차라리 엄마를 닮았으면 쌍꺼풀도 생겼을테고. 훨씬 예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크고.
트라우마라는 게 이렇듯 사람 발목을 잡는다. 어쩐지 영어 말하기 공부는 어디 숨어서 하시는 지는 몰라도 자신 없어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어색하지만 이해는 간다. 당시에 조금 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다면 아버지께서는 외교관이 되셨을까, 늘 영어에 대한 한이 있으신 것 같았는데. 그래서 나를 그리 힘들게 유학 보내셨던 걸까, 나만큼은 자유여행이라도 갈 수 있게, 인생을 더 즐기라고.
왠지 모르게 뭉클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