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의 소소한 예술.
하루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장소 중 하나.
아침의 시작과 밤을 맞이하는 일상의 처음과 끝 사이에 수많은 발걸음이 머물다 가는 곳.
이곳은 바로 지하철역이다. 단어 그대로 땅 아래에 위치해 있기에 특유의 우중충함과 삭막한 느낌, 그리고 퀴퀴한 냄새가 물씬 풍길 듯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포르투갈의 지하철역은 일상의 작은 예술관을 시민들에게 선사하며 건네는 눈길에 활기를 더해준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지하철역을 통과해 목적지로 향하는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우리는 익숙한 스마트폰의 자그마한 화면을 들여다보기 바쁘다.
포르투갈의 모든 지하철역에는 SNS 알림, 인터넷 서칭, 뉴스, 웹툰 등 수많은 자극거리가 가득한 화면에서 벗어나 그 너머로 고개를 들게 되면 눈앞에 펼쳐진 아줄레주의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다. 무료로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이 예술관을 천천히 둘러보다 보면 어느덧 열차는 당신의 눈앞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모두 내가 직접 카메라를 가지고 리스본의 많은 역들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것으로, 조금이나마 그 감성이 느껴졌으면 좋겠다.
아줄레주(Azulejo), "광이 나는 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단어는 형태에서 조금 유추를 할 수 있듯이 아랍어에서 유래됐다. 우리나라 도자기를 빚어내는 것과 같이 진흙을 네모난 모양으로 빚어 무늬를 찍어 넣고 유약을 발라 구워내면 형형색색의 아줄레주로 탈바꿈한다. 내가 포르투갈 예술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화인 아줄레주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역사와 생활에서 분리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그 관계가 밀접하고 끈끈하다.
단순히 미적인 측면을 떠나 집안의 벽면을 장식하는 아줄레주는 여름엔 습기를 차단하고 겨울엔 온기를 머금는 등 온도조절장치의 기능을 하고, 외벽을 장식한 아줄레주는 그 건물의 특성과 정체성을 나타낸다. 교회는 성경의 구절 또는 예수와 성인들의 모습을 각인한 아줄레주로 건물의 겉을 덮기도 하고, 일반 주택의 경우 가족 구성원의 이름, 번지수 등을 새겨 넣기도 한다. 색깔과 무늬가 각양각색인 아줄레주는 그 자체로 시대를 구분하는 역사적 지표가 되기도 하고, 개성을 드러내는 표식이 되기도 하면서 포르투갈 사람들의 삶에 녹아들었다.
지하철까지 아줄레주가 점령하게 된 시기는 1959년, 리스본 시내에 지하철이 개설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예술가 Maria Keil을 필두로 조금씩 조금씩 역사를 다양한 아줄레주로 물들여가며 자연스럽게 지하철역은 예술가들의 전시장이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지하철역이라고 해서 아무 양식의 아줄레주로 장식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 역사의 이름과 특징에 맞는 무늬와 개성을 담았기에 지하철이 서는 역사마다 그 모습이 다르고 구석구석 둘러보는 재미가 생긴다. 예를 들어 Campo Grand(깜뿌 그란드)라는 지역은 투우 경기장이 위치하고 있어 경기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곳의 지하철역 벽면엔 경기를 하는 소와 투우사의 모습이 묘사된 아줄레주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Cidade Universitária(시다드 우니베르시따리아)라는 지역은 국립대학교인 리스본 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지하철에서 내려 대학교 쪽으로 나가는 출구 벽면엔 여러 학자들의 인용구를 담은 아줄레주들이 시선을 끈다.
나는 아테네인 이나 그리스인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세계인이다 by 소크라테스
아줄레주와 같은 미술양식은 무어족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온 이베리아 반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식이다. 그중 포르투갈은 처음엔 이탈리아와 같은 다른 유럽 국가에서 아줄레주를 수입해 구워서 사용했었지만 자체적으로 연구개발에 힘쓴 끝에 그들만의 독특한 아주레주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흰색 타일은 우리나라에서도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색깔과 무늬, 그리고 글자를 넣어 예술로써 승화시킨 형태는 과거 포르투갈의 문화권이 아닌 이상 전 세계에서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같은 역사라도 구역마다 아줄레주의 테마가 다르고, 분위기도 상이하다. 또한 작가에 따라 작품의 제목과 자신의 싸인을 함께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역사 자체가 하나의 미술관이 되고, 역사를 돌아다니며 둘러보는 것만으로 훌륭한 미술관 하나를 탐방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총 4개의 노선이 있는 리스본의 모든 지하철역은 이렇게 각각의 개성을 뿜어내며 매일매일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포르투갈로 여행을 오게 된다면,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은 당연할 테지만 관광지로 이동하는 중간중간에 들리게 되는 지하철역은 어떤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지 한번 요리조리 구석구석 눈길을 던져보는 것도 포르투갈에서만 즐길 수 있는 재미가 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