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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 Nov 06. 2018

엄마의 : '두 번은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


56년생 평범한 우리네 엄마.
어머니가 쓰시는 글을 대신 소개합니다.
부디 어머니의 글로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무렵이었고, 그녀는 당시 고위공직자였던 이모부 댁에 새로 들어온 가사 도우미였다.

나랑 동갑이었던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그 댁에 드나들던 수많은 손님을 치러내는 건 물론 그 큰 살림을 홀로 무리 없이 소화해 내던 능력자 도우미였다.

그 나이에 그런 게 가능하다니... 그럼 그녀가 어릴 때부터 그 일로 잔뼈가 굵었나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녀는, 도우미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살림 솜씨가 얼마나 맵짜고 야물었는가는, 여느 집 행주보다 더 눈부시게 하얗고 깨끗해서 그게 걸레라는 게 볼 때마다 신기했던 그 댁의 흰색 걸레를 단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렇게 그녀가 아무리 대단하게! 일 잘하는 도우미였다 할지라도...

그 당시 나는 빛나는 대학 배지를 가슴팍에 보란 듯이 달고 다니던 콧대 높은 여대생이었고, 그녀는 그저 한낱 도우미에 지나지 않았다.

이모님 댁에 갈 때면 만날 수밖에 없는 그녀와 그저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았을 뿐, 그녀와 친해지거나 어울리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서로의 다른 처지 때문에 같은 나이의 아이를 '도우미'로 만나게 된 자체가 나는 늘 불편했고,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신기(神氣)가 있어, 손금을 신통하게 잘 본다는 얘기가 나오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오기 전 그녀를 짝사랑하던 이웃집 총각이 죽었는데, 그 귀신이 씌어 영험함을 더해준다는 얘기가 누구인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였으나 사람들의 환상을 부채질하기에 꽤나 그럴듯한 스토리였고, 신기하게도 그녀는 손금을 통해 족집게처럼 과거사를 맞춰내곤 했다. 그러니 그 댁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제발 손금 좀 봐달라며 손바닥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집안일 하기에도 늘상 바빴던 그녀가 쉽사리 손금을 봐주지 않는 데다 심지어 복채까지 받지 않으니, 사람들은 공짜 점괘를 얻어 들을 요량으로 어떻게든 그녀와 눈을 맞추고 한 마디라도 더 섞어보려 애를 썼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녀가 특별히 신통한 점괘를 말해준 것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미래에 관한 점괘는 아직 오지 않은 일이니, 맞고 틀리는지 어차피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게다가 과거를 짚어내는 점괘 또한, 그 댁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의 내력을 그녀가 오며 가며 주워듣는 건 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점치러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녀가 툭 툭 던지는 몇 마디 말을 자신의 상황에 꿰맞추며 다들 그녀가 신통방통하다 열광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나 역시도, 영험하다는 그녀가 혹시라도 나에 관한 천기를 누설할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고 우린 '제법' 친해지게 되었다.

그 뒤로 수년 간, 나는 눈치껏 그녀에게 손바닥을 내밀었고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는 점괘를 가슴 졸이며 듣곤 했다.


내가 결혼하고 몇 해 뒤 그녀가 이모님 댁을 그만둔 뒤로는, 이모님을 통해 간간히 그녀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우리는 아주 뜸한 사이가 되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녀와 나 사이엔 설명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생각했던 내게 어느 날 그녀로부터 뜻밖의 연락이 왔다.

이모님 댁을 나간 후 작은 식당을 운영하던 그녀가 결혼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석사학위까지 받은 훌륭한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됐는데, 남편에게 나를 '친구'로 소개하고 싶다며 새신랑과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녀가 실은 남녘의 부잣집 딸이었는데, 명문 Y대에 합격했지만 계모의 반대 때문에 대학 입학을 포기했다는 얘길 언젠가 듣긴 했었다.

또한 계모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왔고, 이웃의 소개를 받아 이모님 댁에 도우미로 오게 됐다고도 했다.

한마디로 그런 하찮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책에서나 읽었던 '계모의 학대'나 '가출'이라는 게, 부모님 울타리 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랐던 나에겐 도무지 현실감이 떨어지는 얘기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얘기들을 조금은 불신하며, 그냥 귓등으로 흘렸던 것 같다.

소설처럼 드라마틱한 남의 어려운 형편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고 공감하기엔, 내가 겪었던 세상이 아직은 너무나 밝고 평화로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유복하게 자랐다는 그녀의 어린 시절과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을 견주어볼 때 너무나 안됐고 불쌍하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나의 친구로 대하거나 속내를 터놓을 만큼 그녀에게 친밀한 감정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에 대한 그 당시의 솔직한 내 마음은, 미래를 알려주는 내 또래의 '신기한 점술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내 마음과는 달리 자신의 '친구'로 나를 남편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갑작스런 그녀의 얘기가 너무 뜻밖이라, 처음엔 당황스러워 뜨악하긴 했다.

하지만 힘들게 살아온 지난 일들을 그녀가 남편에게 시시콜콜 다 말하지 않은 것 같았고, 그녀를 위해 뭔가 작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다 싶어 흔쾌히 그녀 부부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던 것 같고, 지금껏 30여 년을 가끔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결혼 후 식당을 접은 그녀는, 굳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남편이 좋은 직장에 다녔음에도 조간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그 부업이 자신의 수면 시간만 조금 줄이면 될 뿐, 가족들에게 별 지장을 주지 않는 데다 오후 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수년 뒤 그녀가 그 일을 그만둘 때 그녀의 성실함에 반한 신문보급소 소장이 많이 아쉬워했다는 얘길 들었고, 그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큼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 뒤 그녀는 '독서-논술지도교사' 과정을 수료해, 그녀가 살던 동네의 논술 선생님이 되었다.

부모님 밑에서 한껏 멋 부리며 살 나이에 힘들고 고된 남의 집 살이를 견뎌냈던 그녀는, 안정적이면서도 대우받을 수 있는 '선생님'의 위치에 오르자 진심을 다해 성심성의껏 수업을 진행했다.

엄마 같은 마음으로 학생들을 사랑으로 보듬었고, 제 자식 먹이듯 맛난 간식도 직접 만들어 먹이곤 했다. 그런 그녀의 수업엔 학생들이 늘 넘쳐났고, 지금껏 인근에서 상당히 유명한 논술 지도교사로 존경받으며 잘 살고 있다.


'독서-논술지도교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필요에 의해서라도, 그녀의 독서량은 평범한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나온 십수 년간, 그녀가 읽었을 숱한 책들을 통해 그녀는 지적으로 많이 성장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비단 독서뿐 아니라 다른 모든 면에서,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자신을 향상시키려 애쓰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적잖이 놀라고 때로는 많이 배우기도 한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다를 순 있겠으나, 고인 물처럼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퇴보하며 나이 들어가는 이들에 비한다면, 그녀가 삶을 대하는 자세는 칭찬받아 마땅한 것 같다.

 

타인의 눈엔 고난이라 여겨질 법한 힘든 시간들조차도, 늘 "이것도 감사하다!"며 살아왔다는 그녀.

한때 나는, 그녀와 내가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생각한 적도 분명 있었다. 그러한 그녀가 역경을 딛고, 내 주변의 다른 그 누구보다 멋지게 잘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흐뭇하면서 한편으론 경이롭기까지 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시련을 겪기도 하고,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통이 따르는 어려운 시절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운명의 소용돌이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헤쳐 나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삶이 전개될 수 있음을, 만날 때마다 조금씩 진화하는(?) 그녀를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다.


며칠 전 그녀가 시집 한 권을 보내왔다.

폴란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199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Wislawa Szymborska) 유고시집 "충분하다" 였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주옥같은 시 "두 번은 없다"는 이미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의 2015년 겨울 편에 실려,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주기도 했었다.


그녀가 보내준 시집을 읽다 보니, 어쩌면 그녀는 어린 나이에 이미!

삶의 매 순간이 '두 번은 없다'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야말로,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삶의 교과서요 참스승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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