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해결책일까, 임시방편일까
5월 초 제주도 여행 후 남편과 나는 대체로 평안했다. 때로는 아슬아슬했지만, 선을 지키며 작은 위기들을 넘기고 있었다. 신혼 몇년간 피터지게 싸우다가 평화를 찾는다는 게 이런걸까 싶었다. 배려라기보다는.. 부부싸움이 칼로 물베기라는 말이 점점 와닿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한 거리두기의 느낌에 가까웠다.
그러다 8월의 마지막주, 결국 서로 쌓아두던 감정이 또 한 번 폭발했다. 우리의 평화는 그저 꾹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되는 회피였을까. 이제는 힘들다는 생각도 건너뛰고 나의 결론은 바로 이혼으로 직진했다. 더 이상은 이렇게 같이 못살겠다.
남편은 그동안 우리 가족 4명이 쌓아온 시간이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 순간 나에게는 그 시간보다 앞으로 견뎌야 할 시간, 내가 아닌 내 아이가 견뎌야 할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이 넘도록 우리의 대화는 진척이 없었고 눈물만 쏟아냈다. 당장 내일은 가족여행을 가기로 한 토요일이다. 그만두는 판국에 무슨 여행이야, 했지만 아이들은 당연히도 무척 가고 싶어하며 잠들었다. 새벽2시가 넘어 일단 잠을 자고 내일 계획되어 있던 여행은 떠나자고 했다.
나는 제조업에 종사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가 기관에 다닌 후로 내 휴가는 항상 7월말8월초로 고정되었다. '7월 말 8월 초는 너무 비싸, 굳이 바쁜데 무슨 여행이야, 아이들이랑 휴가 가봤자 그게 휴가야? 더 피곤하지.. 다음에 가자.' 여름휴가를 미뤘다. 올해 여름은 유독 바빴고, 바쁨에 치인줄도 모르고 8월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회사 휴양시설 가는 게 벌써 토요일인데 뭐 먹고 싶어요?" 뭘 살지 물어와서야 알았다. 아! 가기로 했었지. 그 날짜는 8월보다 더 바빴던 7월의 어느 날 내가 오케이 했던 날짜였다.
전날 밤 사네마네를 논하며 눈물을 많이도 흘렸지만, 일단 책, 다이어리, 생각노트, 필사노트, 노트북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여행지로 향했다. 2시간 반동안 차는 멈추다 가다를 반복하며 여행지로 달렸다. 감정은 상할 대로 상한지라 남편은 마음을 가다듬으려 뉴에이지 음악을 틀었고, 차 안은 가는 내내 말없이 조용했다. 바로 옆에 앉아 나는 미뤘던 생각노트도 쓰고, 인스타도 보고 시간을 때우다가 리조트에 도착했다.
여행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아 내가 지쳤었나 보다.
이 잔디가 뭐라고 이렇게 좋은가...
반듯반듯하게 관리된 정원 같은 모습에 땡볕에서 이걸 관리하시는 분들의 노고가 보이고 감동이 밀려왔다. 스콜에 가까운 소나기가 내린 후 잔디는 짙은 풀내음을 내어주었다. 그 향을 깊게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일상에서 멀어졌다.
저녁에 아이들을 재우고 다시 마주 앉았다. 도착해 느낀 감격에 가까운 감정을 남편도 느낀듯했다. 아.... 우리는 또 지쳤던 걸까? 여행이 우리 관계의 해결책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정기적으로 여행을 가면 좋을까? 이마저도 그저 잠시 덮고 넘어가는 회피에 불과한 걸까..? 재혼한 남편과의 위기에서 나는 항상 생각한다. 살아보니... 뭐든 그만두는 건 참 쉬운 선택이다.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게 진짜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 것만이 슬픔이 아니라, 나이를 먹을수록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게 참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