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벗어나게 해준 첫번째 남자

내 삶의 동력 4명의 남자들 : 1인공방이란

by 도비앤

지난 글에서 날 행동하게 하는 쿠팡 알바에 대해 썼다. 지금은 왼발인지 오른발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 멍, 대수롭지 않게 찾아온 그 멍은 나에게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직장인이 아닌 내가 시간을 쓸 때, 쿠팡에 가서 7만 원을 버는 것 이상의 성과를 내는 하루를 사는지 돌아보곤 한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그날의 힘듦도 옅어져 가지만, 여전히 내 삶에는 그 멍 같은 자극제가 계속해서 나온다. 그 멍 이상으로 강력한 내 삶의 자극제, 날 움직이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데는 네 남자의 도움(?)이 컸다.


첫 번째 남자는 바로 전남편이다.

좋게 헤어졌다 할 수 없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데에는 분명히 그의 몫이 있다. 그는 사업가였다. 작은 회사의 사장이었는데, 주변에 직장인만 있었고 나 또한 직장인이던 시절에 만났다.


내가 다니던 중소기업에서는 사장의 와이프가 회계부서에 앉아있었다. 사모님이라고 불리던 그녀는 항상 오전 늦게 출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천천히 나온 것이겠지. 언제나 여유로워 보였음은 물론이고 가장 늦게 출근하지만 가장 빨리 퇴근하는 것도 그녀였다. 그때 나는 사장보다도 그녀의 삶이 부러웠다.


어느 날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전남편은 거기서 날 보고 소개를 해달라고 해왔다. 쭉 거절하다가 소개를 받기로 했는데, 첫인상과 달리 속전속결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까지는 1년의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나는 바로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는 내가 집에서 당연히 내조를 해주기를 바랐고, 나 역시 고된 회사생활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이후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다니던 회사의 사모님만큼이나 오히려 그 이상으로 여유로워졌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점은 늘 여유로운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전남편 역시 대체로 여유로웠다. 그는 툭하면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나와 같이 놀았다. 저금보다는 욜로를 선택하여 더욱 그랬겠지만, 그는 드라마는 물론, 게임을 즐겨하고, 하고 싶은 건 다 하며 사는 것처럼 보였다. 직원이 있다는 게, 자기 일을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때 어렴풋하게 느꼈던 것 같다.


이혼 후 친정에서는 당연히 내가 재취업을 하길 바랐다. 친정 부모님도 일을 하셨지만, 어쨌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니 아깝게 썩히지 말고 다시 일을 하길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직장인이 다시 되고 싶지는 않았다.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한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안타까운 건 당시 사업과 장사의 차이를 몰랐던 나는 자영업의 길로 들어섰는데 그건 다름 아닌 장사였다.



나름의 여러 고심을 거쳤다. 아기를 케어하는 시간, 내가 성장할 시간도 갖고 싶었다. 일반적인 자영업이나 직장인처럼 메여있지 않고, 돈도 벌 수 있는 1인 공방을 준비했다. 당시 코로나가 시작되어 다들 만류했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창업에 성공했다. 결혼 전 벌이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했지만 원래도 소비를 즐겨하는 편이 아니었고,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나는 덜 벌어도 더 많이 모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공방은 100% 예약제로 운영했기에 시간이 꽤나 자유로웠다. 6개월치 고정비를 준비하고 창업을 했는데, 나는 단 2달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내 선택이 옳았고, 직장인보다는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처음 맞은 어버이날은 엄청났다. 한 해 수입을 그때 버는 거라던 선배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과로로 면역력이 떨어진 탓인지 얼마 뒤 나는 코로나에 걸렸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에 걸리면 구급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송되어 격리를 해야 했다. (18개월 됐던 아기와 함께 울면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싣려 갔었는데, 그때 병원에서 아기가 낮잠을 잘 때 코로나일기를 쓰기도 했다.) 어버이날의 수입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격리당한 그 기간 동안 나는 공방을 운영할 수 없었다. 직장인이었던 엄마는 격리 중에도 월급이 고스란히 들어왔지만, 자영업자였던 나는 수입이 바로 중단되었음에도 월세를 내고, 격리당한 동안 쓰지 못한 식재료는 버리는 등 온갖 고정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아, 내가 선택한 일이 다름 아닌 내 노동력과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일이었구나.' 이건 전남편이 하던 사업과는 달랐다. 그는 출근하지 않아도 돈이 들어왔지만, 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이 끊겼다. 직장인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1인 공방의 실체는 그저 돈과 바꿔 시간을 조금 더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사람을 쓰고, 공방의 확장성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공방에서는 판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강생도 받아 가르쳤는데, 오로지 작은 짤주머니 끝에서 피어내는 앙금 플라워는 만드는 사람마다 같은 꽃을 만들어도 꽃모양이 달랐다. 수제의 장단점이랄까. 수강생들을 많이 접할수록 생각보다 이게 잘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량생산이 거의 불가능했고, 공방운영 2년 차에 나는 내가 사업이 아닌 장사를 시작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선택한 1인 앙금플라워 떡케이크 공방은 확장성이 거의 없었다. 내 제품은 복제하듯 생산할 수가 없었다. 이는 사람을 쓸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쯤 <<레버리지>>라는 책을 읽고 내 일을 나눠야 한다는 걸 알게되었다. 생산을 나눌 수 없다면, 못지않게 시간이 들어가는 마케팅이라도 맡겨볼까 싶었다. 문제는 흔하디 흔한 블로그나 인스타 광고를 해준다는 회사들을 나는 믿지 못했다. 첫회사에서의 직무가 온라인마케팅기획이기도 했고, 취미로 10년 넘게 개인블로그를 운영 중이었기에 그들의 행태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또 레버리지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이외에도,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1인 공방에는 심각한 아이러니가 있었다. 개인 블로그를 하다가 확실하게 마케팅을 잘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믿을만했고 비싸도 확실히 레버리지 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어째서인지 나는 계속 그 기회를 미루고 있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많이 팔아야 한다. 밀려드는 주문을 쳐내듯 해결하고 나면 나는 언제나 녹초가 되었다. 주말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목요일쯤부터 나는 어딘가 끌려가 탄광을 캐거나 쫓기는 꿈을 자주 꿨다. 마케팅을 하면 당연히 주문이 더 들어오고 그럴수록 나는 더 힘들어졌다. 어느 순간 마케팅하는 걸 꺼려하고 최소한으로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이후로는 판매보다는 출강에 집중했지만, 여전히 나는 내 시간과 돈을 바꾸고 있었다. 서서히 나는 내 노동력과 시간을 더 줄일 다른 길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틈틈이 투자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지만 현생에 치여 드문드문하던 차에, 나는 내 두 번째 남자의 덕을 톡톡히 본다. 이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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