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성장시키느니, 내가 성장하고 말겠어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해 준 두 번째 남자

by 도비앤

그는 현 남편의 아들, 나에게 갑작스레 생긴 6살 아들이었다. 6살에 나는 그의 엄마가 되었다. 4살에 처음 만난 아이는 잘 웃고, 잘 안기는 귀여운 아이였다. 5살에 같이 여행을 갔을 땐,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다. 6살에 가정을 합치기로 결심했을 때, 아이의 담당 교수는 남편을 잠깐 내보내고 나에게 진지하게 얘기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이가 자폐스팩트럼이며 정상아와 달리 육아가 힘들 것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쯤 아이는 또래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저 느린 아이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첫 번째 결혼때와 마찬가지로 오만하게 내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장애등록도 했지만, 그때까지도 조금 느린 아이라고 생각했다. 6살 유치원 담임과는 한번 통화하면 기본 30분인 상담전화를 심심치 않게 했다. 유치원 선생님이 그렇게 자주 전화하지 않는다는 걸 둘째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일주일에 세네 번은 치료센터에 데리고 다녔다. 센터선생님들의 피드백, 유치원 선생님과의 잦은 통화 등을 종합해하는 아이를 더 정확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선생님들의 피드백은 제삼자 어쩌면 전문가들의 객관적이고 애정 어린 시선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그들이 아이를 이해한 게 맞았을까? 의문이 들기는 한다. 나 역시 친모가 아니었기에 남편보다 더 객관적으로 아이를 보고 있었다.


7살이 될 무렵 남편에게 아이를 특수반에 보내자고 제안했다. 남편은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아이는 정상발달 아이와 점점 차이가 생겼고, 차라리 7살에 잠깐 특수반에 보내서 도움을 받고 8살에 일반반으로 입학을 시키자고 남편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아이는 7살에 병설유치원의 특수반으로 옮기게 되었다. 아이는 여러 능력 중 특히 언어능력이 2년은 더 쳐져있었다. 고민 끝에 학습지로 한글, 국어, 수학을 시작했는데, 학습지라는 것이 주 1회 선생님이 오시기는 하지만 사실상 공부는 엄마가 시켜야 한다. 아이들 공부에 진심이었던 만큼, 남편도 나에게 첫째의 한글 떼기를 부탁했다. 평소 학습능력에 비해 다행히 아이는 예상외로 통단어로 외우는 단어카드를 곧잘 외웠고 내 마음에는 희망이 싹텄다. 하지만 예상외로 1년이 다 되어도 한글 떼기는 미적지근했다.


7살 병설유치원의 겨울방학은, 아니 특수반 아이의 겨울방학은 길고도 길었는데, 남편과 나는 그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다. 매일 집에서 한글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 8살 3월 입학 전에 어느 정도 한글을 읽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꼭 만들어보자 결심했다. 매일 집에서 조금씩 한글공부를 하고 점심이면 나가서 동네 맛집투어를 해서 블로그에 올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는 이제 어느 정도 받침이 없는 한글을 읽어나갔다. 호기롭게 받침을 시작했는데, 받침은 정말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외웠던 단어카드의 단어마저 잊어버리기도 하고, 아이는 한글을 뗄 수 있을 것만 같던 내 희망을 짓밟고, 그동안 가르친 나의 노력을 비웃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아이가 의도한 바는 전혀 아니었지만 나는 나날이 너무도 억울해져 갔다. 도대체 내가 들인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친자식이어도 나는 이렇게 억울한 마음을 품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받침이라는 거대한 벽을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심지어 아이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공부를 싫어했고 떼를 쓰곤 했다. 그러다 보면 나는 떼쓰는 아이를 혼내고, 혼나도 아이는 못하고 악순환의 챗바퀴가 돌아갔다. 그날도 남편은 출근했고, 여느 날처럼 둘째를 유치원에 보내고 왔다. 나는 직장인이 아닌 자영업자라는 이유로 아이를 데리고 공방으로 출근을 했다. 그해 겨울은 아이가 집에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주문을 조절해 가며 아이와 주문사이를 오갔다. 정신없이 주문을 쳐내고 또 아이와 함께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놀았다. 이날도 아이에게서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벌써 2월인데, 내가 과연 남은 한 달 동안 이 아이의 한글을 뗄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내가 대체 뭘 하는 거지? 왜... 이렇게 얘한테 내 시간을 쏟아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심지어 하루 종일 첫째와 보내고 지친 나는 둘째가 하원하고 돌아올 때면 이미 너무 힘들었다. 사랑하는 둘째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 같아 첫째가 미워졌다. 2월 말이 되자 내 감정은 범벅이 되었다. 나는 첫째와 보낸 시간만큼 아이에게 스며들었지만 동시에 아이를 미워했다.


3월이 되어 결과는 대실패였다. 아이는 겨울 내내 그렇게 공부를 했음에도 받침을 전혀 읽지 못했고, 심지어 곧잘 외웠던 단어카드마저 잊어버리기도 했다. 나는 이 아이를 못 바꾼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잠깐 도약을 위해 보내는 거라던 7살 특수반은 그저 우리의 바람이었다. 7살 여름, 초등학교 진학을 위한 상담이 시작됐다. 특수반 선생님은 강력하게 초등 일반반을 반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그럴까? 싶었지만 선생님의 의견을 믿고, 아이가 더 힘들지 않도록 일반 초등학교의 특수반으로 입학원서를 넣었다. 7살 겨울이 되자 또래 아이들은 정말 빠르게 성장했다. 우리 애는 그 자리에서 한걸음 나아갔는데, 다른 아이들은 이미 저만치 뛰어갔다.

공부를 시켜봤기 때문일까, 친엄마가 아니어서였을까 나는 아이 공부를 남편보다 빠르게 내려놨다. 8살 3월부터 아이 공부는 남편의 몫으로 넘어갔다. 아이의 담당교수는 "공부는 그냥 아이가 기분이 좋을 때, 가끔 토요일에 일어났는데 기분이 좋아 오후에 놀러도 갈 거야, 이런 날 조금만 시키세요."라고 했다. 우리는 아직도 이 말은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교수는 부모가 10을 쏟아부었을 때 보통 아이는 7이나 8을 보여준다면, 우리 아이는 0.1도 안 보여 줄 수 있다고 타고난 토양이 척박한 거라고 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 0.1, 0.05의 아주 느린 걸음으로라도 아이는 성장을 하긴 하기 때문에... 공부를 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는 최소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를 성장시키느니, 내가 반드시 성장하고 말겠다." 나는 그해 겨울을 겪으며 이걸 깨닫고 결심했다. 아이의 성장대신 내가 성장하기로 했다. 수없이 싸우며 남편조차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지 않는가. 나는 내가 결심하면 바꿀 수 있다. 세상에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첫째는 나에게 이걸 깨닫게 해 주었다. 첫째가 8살이던 작년,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전과 많이 달라졌다. 남을 바꾸려 매진하던 시기에 비하면, 내가 나를 위해 노력하는 건 참 쉽게 느껴졌다. 삶을 대하는 태도뿐 아니라 많은 변화가 일었다. 그래서 나는 내 성장의 원동력, 두 번째 남자는 우리 첫째 아들이라고 꼽는다. 그는 내 삶을 바꿨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직장에서 벗어나게 해준 첫번째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