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원동력 : 세 번째 남자
이쯤 쓰고 보니 내 삶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분노였다는 걸 알겠다. 앞의 두 남자가 내 인생에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켜 터닝포인트가 되어주었다면, 오늘 쓸 세 번째 남자는 꾸준한 동력이랄까. 그는 바로 나의 현 남편이다. 나는 이 이상한 상관관계를 떠올릴 때마다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난다. 매트릭스 영화의 한 장면, 사람들이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있다. 그들은 가상의 세계에 살고, 현실은 누워서 배터리로 쓰임을 당한다. 충격적이었던 장면이어서 그런지 그 장면은 유독 선명한데, 남편이 들으면 경악하겠지만 나는 종종 남편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배터리팩 같다.
이미 썼다시피 우리는 각자 아이를 하나씩 데리고 재혼을 했다. 대체로 아이들의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졌으나, 2년 넘게 싸우고 보니 그와 나는 전혀 다른 종족이었다. 이는 단순한 남녀의 차이를 넘어서서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서로 이런 사람은 처음이라고 싸우고 싸우다,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의 사고방식 사이에 끝이 안 보이는 높은 벽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바라보는 시각은 다름을 넘어서는 것 같다.
결국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인 우리 둘의 문제였다. 둘째가 6살일 때, 아이들이 싸웠고 둘째가 첫째의 얼굴을 심하게 긁었다. 재혼 첫 해만 해도 6살이던 첫째가 4살 둘째를 수없이 밀치고 장난감을 빼앗기 일쑤였는데 둘째가 5살 무렵, 둘째는 물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할퀴기 시작했고 순한 천째는 반격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의 어린 피부는 연고를 발라주면 금세 나았지만 남편의 마음에 생긴 상처는 낫지 않고 쌓여갔다.
아이들이 8살, 6살이던 초여름, 또 한 번 심하게 첫째 얼굴에 상처가 났다. 남편은 별러왔던 터라 거칠게 둘째를 잡아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나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견뎌야 했다. 잘못이 반복되고 첫째가 계속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 끝이 나고 둘째를 보러 들어간 나는 경악을 했다. 아이의 종아리에 빨갛게 부어오른 흔적이 선명했고, 나무 옷걸이는 아이를 친건지 바닥을 친건지 부러져 있었다.
남편의 분노를 이해는 했지만 과했다. 나도 첫째가 6살에 툭하면 밀치고 뺏는 꼴을 지나왔는데, 할퀴는 건 백번 잘못했지만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달랐다. 순한 첫째는 태어나길 착하게 태어났는데, 둘째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나는 첫째를 더 미워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이혼을 해야겠다 결심했고 바로 둘째와 간단한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빨갛게 부어올랐던 아이의 다리는 점차 멍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데리고 괜히 재혼을 해서 상처를 준 것 같고, 집을 나오니 더욱 서러웠다.
눈물을 닦고 앞으로 닥친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내 노동력 투입을 줄이기 위해 평소 눈여겨보았던 무인 아이스크림 창업을 결심했다. 매물을 찾고 바로 부동산에 연락해 아이와 함께 몇 군데 상가자리를 봤다. 당장 마음에 꼭 드는 상가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부동산 사장님께 충분히 내가 원하는 조건에 대해 설명을 했고, 2달 뒤 나는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이 되었다. 이게 내 첫걸음이었다.
남편은 첫째가 보고 싶어 한다며, 날 만나러 왔다. 내가 종종 미워했음에도 첫째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안겨왔다. 밉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첫째가 나에게 스며들어있음을 느꼈다. 함께 보낸 시간들이 얄궂게 느껴졌다. 남편은 앞으로 절대 아이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약속과 반성을 했다.
남편은 약속대로 둘째에게 손대진 않았으나 우리는 여러 일로 크고 작은 싸움을 지속하며 지쳐갔다. 그날 이후 나는 크게 싸우고 나면, 이혼을 생각하는 게 더 쉬워졌다. 내 생각은 고민할 것 없이 바로 '못살겠다'로 직진한다. 나에겐 이미 집을 나갔던 날 작성해 둔 '다시 홀로서기'파일이 있다. 이대로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기는 싫다. 더 나은 환경을 원한다. 돈을 더 벌어야 한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린 그 해 겨울, 나는 공방을 정리했다. 당장의 벌이는 공방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내 노동력을 빼는 데는 확실히 성공했다.
25년인 올해 봄 또다시 심하게 싸웠다. 수입을 더 늘리기 위해 나는 소소한 사업장을 하나 열었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내민 손을 잡고, 제주도 여행을 가고 한동안 평화로웠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여름이 되어 우리는 또 싸웠고 나는 두 번째 사업장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최근 우리는 또 싸웠고 나는 어느새 세 번째 사업장 오픈을 앞두고 있다. 이제는 이런 생각까지 든다. '올해 한 번만 더 싸우면 네 번째까지 오픈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