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도 립밤이 필요해

by 권민창

저는 입술이 건조한 편입니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입술이 굉장히 잘 터요. 립밤이 없으면 굉장히 괴롭습니다.

며칠 전 집 근처 CU편의점에 립밤을 사러 들렀습니다. 마침 니베아 립밤이 2+1행사를 하고 있더라구요. 하나에 4100원 3개에 8200원. 하나는 집에, 하나는 가방에, 하나는 사무실에 놔두면 딱 맞을 거 같아서 3개를 샀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8200원이 큰 돈일수도 있지만, 겨울을 좀 더 윤택하게 보낼 수 있으니 저에겐 충분히 가치가 있는 지출입니다.


매번 똑같은 립밤을 샀었는데, 이번에는 2+1이라 한 번 과감한 도전을 해봤습니다. 딸기색 립밤을 하나 구매했어요. 티비에서 보는 박보검처럼 생기있고 사랑스런 입술을 기대하고 발라봤습니다만, 굶주린 도살자의 느낌이 나네요. 역시 립완얼이네요. 분기탱천(분한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 격렬하게 북받쳐 오름)합니다...


2010년이었을까요, 아이리스란 드라마가 굉장히 유행했었습니다. 김태희가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였기에 사실 재미가 없을 수가 없죠. 그냥 김태희 얼굴만 봐도 재밌는 드라마였습니다. 그리고 남자 주연은 이병헌... 여성분들도 남성분들과 비슷한 느낌이었겠죠? 그래서 이 드라마는 35%정도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많은 패러디를 양산할 정도로 유명해진 대사가 있죠. '이 동상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왜 립밤과 관련없는 아이리스 얘기를 했냐구요? 저도 립밤에 슬픈 전설..이라기보다는 따뜻한 추억이 있거든요.


지금의 저를 아는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저는 굉장히 숫기가 없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저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두려워했고, 혼자 있는 시간들을 좋아했죠.

그런 저는 고2때 첫 연애를 하게 됩니다. 아마 그 당시에 친한 친구들도 거의 몰랐을 겁니다.

뭔가 부끄러웠거든요. 연애한다는 자체가.


돌아보면 더없이 순수했던 연애였습니다.

보고 싶고 좋아하는 마음은 바다보다 컸지만, 표현에 너무 서툴렀어요.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어바웃타임의 팀처럼 그때로 돌아간다면, 표현을 많이 해주고 싶어요.


당시 여자친구는 부산, 저는 진주에서 기숙사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한달에 2번 정도 보는 게 다였습니다. 데이트를 하더라도 쑥쓰러워 손도 못 잡았어요. 그저 같은 방향으로 걷다가 눈 마주치면 어색하게 씨익 웃던 바보였습니다. 따뜻한 봄에 만나, 추운 겨울이 되었습니다. 여자친구의 생일도 겨울이었죠. 첫 연애였고, 어떤 걸 선물해줘야할지 한 달은 고민했던 거 같아요. 좋은 걸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참 미안하고 괴로웠던 거 같습니다. 고민고민하다가 마지막 데이트때 여자친구의 입술이 텄던 게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마트에 가서 편지지와 립밤을 사서 센스 없이 포장도 안하고 그냥 줬어요.


'생일축하한다.' 어색하게 선물을 건네는 저에게 여자친구는 활짝 웃으며 입술을 내밀었어요.

부산대 근처 지하철 다리 밑이었던 거 같은데요, 그게 제 인생의 첫 키스였습니다.

(키스라기보단 그냥 뽀뽀에 가까웠던 것 같기도..)


그래서 저에게 립밤은 참 의미가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그 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떠오르곤 해요.

이렇게 립밤처럼 우리에게 물건 이상의 의미를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꽃일수가 있겠구요, 누군가에게는 향수가 될 수도 있겠죠. 이것들의 공통점은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겁니다.


나이가 들고 많은 상황에 처하다보니 스스로 각박해지고 날카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터버린거죠. 이럴 때는 마음의 립밤이 필요한 거 같아요. 이 때 마음의 립밤은 따뜻한 말이 될 거 같습니다. 차이점은 따뜻한 말들은 립밤처럼 4100원이 아니라 무료라는 거, 하지만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거겠죠.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덕분에 너무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같은 말들이요. 이런 따뜻한 말들은 꽃으로 피어나더라고요.


어제 일이 있어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저녁 늦게 버스를 타고 원주에 도착했는데요, 추운 날씨에 버스 앞에서 손님들을 배웅해주시는 기사님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덕분에 너무 편하게 왔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기사님도 '감사합니다.'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더라고요. 따뜻한 인사가 서로의 마음에 립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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