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좋아했던 그때의 내가 좋아.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해줘서 고마워.

by 권민창

엄마가 정성스레 발라주신 무스로 머리에 한껏 힘을 주고, 검은색 나비넥타이로 멋을 냈던 초등학교 1학년 때 전 처음으로 심장이 요동치고, 많은 공간에서 단 한 사람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해요. 2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친구의 이메일 주소가 또렷이 기억나니까요.

첫사랑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때가 첫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서툴렀기에 사랑에도 서툴렀던 그 시절, 좋아한다는 표현 대신 짓궂은 장난만 쳤고, 그 장난에 분해 눈물 흘리던 그 친구를 보며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채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됐고, 21살 때가 돼서 나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친했던 친구에게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명문대 영어영문학과에 다니며 아나운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그 시절 제가 좋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똑똑하고 당차게 살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어렵사리 그녀의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문자를 보내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거 같아요. ‘장난기 많던 그 시절처럼, 가볍게 문자를 보내야할까? 아니면 8년의 세월을 허투루 보낸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어른스레 문자를 보내야할까?’
그렇게 어렵사리 문자를 보냈고, 몇 시간 뒤 온 그녀의 문자는 생각보다 너무 따뜻했습니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새 침대에 누워 문자를 주고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말 저녁, 강남역 근처에서 얼굴을 보기로 했죠.
짧은 머리를 왼쪽으로도 넘겨보고, 오른쪽으로도 넘겨보며, 8년의 시간동안 장난기 많던 소년은 남성미 뿜뿜하는 상남자로 진화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대망의 약속날, 저는 그녀와 강남역 12번 출구에서 만났고 굉장히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야 민창아 반갑다. 술 마시러 갈래?’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고 바보 같지만, 제 머릿속의 그녀는 술은커녕, 여전히 순수하고 풋풋한 한메일을 쓰던 초등학교 1학년때의 모습에 머물러 있었거든요.
뭐가 그리 불만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아니, 난 괜찮아. 그냥 밥이나 먹자.’라고 퉁명스레 말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저의 부정적인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반가움의 감정을 얼굴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 날 식당의 분위기는 떠들썩했지만 그녀와 제가 앉은 테이블만 조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 ‘첫사랑은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기는 게 좋아.’라는 말을 틈만 나면 주변에 하고 다녔습니다. 내가 그 증거라고. 보면 실망만 할 거라고 말이죠.
그렇게 9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창현이라는 동생과 첫사랑 얘기가 나왔고 오래간만에 그 친구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제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 웃으며 창현이에게 얘기했죠.
그러자 창현이도 첫사랑과 2주만에 헤어졌던 기억이 난다며 웃었습니다.
서로 한참을 웃다 조용해졌어요. 아마 둘 다 다시 한 번 첫사랑을 떠올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그 친구의 페이스북을 들어가봤어요. 8년 전,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풋풋함은 사라지고, 완연한 30대의 성숙미가 돋보입니다. 아나운서가 아니라, 영상 관련 스타트업에 종사하고 있는 거 같네요. 여전히 글을 잘 쓰고 웃음이 이쁩니다.
‘고마워’라고 조용히 되뇌였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그 소녀’라는 영화에서 션자이의 행복을 빌어주는 커징텅처럼요.
그 친구를 좋아했던 그 시절의 제가 좋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첫사랑의 추억을 마음 깊숙이 아로새겨 준 그 친구에게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