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힘이 되어준, 불행 속에서도 나를 버티게 한 따뜻한 기억들.
불행만은 아니었던 나의 유년시절
친엄마와의 기억은 아주 어렸을 때지만, 그래도 또렷이 떠오른다.
아빠는 건설업에 종사하셨는데, 해외 근무를 하게 되면서 처음엔 혼자 나가 계셨고, 나중엔 엄마와 나, 언니까지 모두 함께 따라가 살았다. 6년 동안 해외에서 살았다고 들었다. 내가 7살 되던 해까지 살았으니 아마 1살이나 2살쯤에 그곳으로 간 것 같다.
해외에서의 유년 시절은 꽤나 행복한 기억이 많다. 엄마는 언니와 아빠를 뒷바라지하느라 늘 바빴지만, 나는 친구 집에도 자주 놀러 갔고, 집에는 식모도 있어서 나와 많이 놀아줬다.
동남아 지역이라 물가와 인건비가 저렴해 한국에서보다 좀 더 여유롭고 윤택하게 살았던 것 같다. 집은 아파트가 아닌 단독 2층 주택이었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에 세탁실로 쓰던 방이 있었고, 그 옆에는 언니와 내가 함께 쓰던 방, 또 그 옆이 안방이었다. 특히 세탁실과 우리가 자는 방 사이에 이어지는 작은 통로가 있었는데, 그 공간이 아직도 비밀의 공간처럼 특별하게 느껴져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집 1층 문을 열고 나가면 넓은 계단이 펼쳐졌고, 계단을 내려가면 왼쪽에 작은 마당이 있었다. 거기서 엄마와 아빠는 골프 연습도 하고, 친한 가족들을 초대해 바비큐 파티도 자주 열었다. 1층에는 입구 쪽에 어항, 피아노, TV, 원형 탁자가 있었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부엌이 있었다. 부엌을 지나면 밖으로 이어지는 골목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현지 국적의 식모가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식모는 나랑 자주 놀아줬고, 스티커도 놀이도 해주면서 놀아줬다. 어린 나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따뜻하게 채워줬던 존재였다. 내 기억에 굉장히 어리고 순한 인상의 얼굴이 기억난다. 내 낮잠도 식모가 재워주거나 엄마가 재워주었는데 엄마는 내 배를 토닥여 주었고 식모는 머리카락을 한올한올 빗어줬고 더워서 땀이 나면 입으로 후후 불어서 땀을 식혀줬다. 그 기억은 너무 따뜻하고 또렷해서 감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누군가 내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걸 좋아한다.
그녀에게선 어떤 질투심이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우리 집 식모라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도 없이, 나를 그저 편안하고 다정하게 대해줬다.
부엌 옆 골목을 지나면 차고가 있었고, 아빠의 차가 그곳에 주차돼 있었다. 운전기사 아저씨도 계셨는데, 콧수염이 수북하고 쌍꺼풀이 짙은 통통한 인상의 분이었다. 내가 다녔던 유치원 같은 곳에서 놀다가 늦게 나왔는지, 아저씨가 직접 건물 안까지 들어와서 나를 데리러 왔던 기억도 난다.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날씨가 무척 더운 지역이라 수영장이 잘 되어 있었고, 우리는 거의 매일 수영장에서 놀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물고기 같다"며 웃으셨고, 난 더 신나서 물놀이에 빠져들었다. 엄마는 항상 수영장에 같이 가주셨고, 곁에서 지켜보며 기다려주셨다. 엄마의 육아 방식은 강압적이지 않았고, 되도록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존중해주는 편이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윽박지르는 모습은 거의 기억에 없다.
그래도 가끔 무언가 잘못해서 엄마를 화나게 한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땐 혼이 나기도 했다. 당시엔 체벌도 있었는데, 내가 식모 뒤에 숨어 피하려 했던 기억이 있다. 식모는 엄마에게 "아기니까 때리지 마세요"라고 했던 것도 생생하다. 또 한 번은 엄마 옆에 있다가 내가 눈치 없는 말을 했는지, 갑자기 꼬집힌 기억도 있다. 훈육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아마 아이의 실수와 엄마의 감정이 얽혔던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그냥 혼났던 기억만 남아 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게 엄마가 날보며 화가 났는지 "주먹이 운다...."라고 하며 화를 참은 기억이 난다. 천방지축에 순수했던 나는 '주먹이 울어? 주먹이 어떻게 울지?' 하고 천진난만하게 생각했는지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아찔한 지점이다. 엄마가 얼마나 화를 참으며 이야기 했는지 짐작이 가서 피식하고 웃음이 나는 기억이다.
아빠는 회사에 아침 일찍 나가고, 우리가 잘 때쯤 집에 돌아왔다. 회식 자리도 잦았는데, 한 번은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아빠가 만취해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언니랑 내가 아빠를 챙겼던 기억도 있다.
엄마는 아빠가 일하는 회사 구내식당에서 일했고, 집에서는 베이킹도 자주 하셨다. 특히 쉬폰 케이크를 자주 만드셨는데, 아마 간단하고 쉽게 만들 수 있어서였던 것 같다. 주방에서는 언니 친구들과 함께 이것저것 만들기를 자주 했는데, 두리안을 반으로 쪼개 냄새에 질렸던 기억도 난다. 언니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 난 그게 더 충격적이었다.
과일을 갈아 얼려서 아이스크림처럼 만들기도 했고, 옥수수 씨를 튀겨 팝콘을 만들기도 했다. 생크림을 휘핑한 기억도 나지만, 그걸로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나라 카레도 기억에 남는다. 식모가 자주 만들어줬고,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한국에 와서 노란 카레를 보며 "이건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곳의 카레는 색이 더 거무튀튀했고, 맛도 꽤 달랐다.
냉장고 야채칸엔 항상 카프리썬이 가득 있었고, 나는 자주 꺼내 마셨다. 젖병에 물을 넣어 마신 기억도 있는데, 그 젖병에서 나는 우유 비린내가 아직도 생생하다.
장난도 많이 쳤다. 언니가 자고 있을 때 쿠킹호일을 작게 뭉쳐 코딱지처럼 만든 뒤 언니 콧구멍에 넣기도 했고, 언니 얼굴 위로 올라가서 방귀를 뀌겠다고 해선 또 혼났다. 내가 워낙 장난기가 많고 호기심도 많아서 언니가 꽤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동남아라 그런지 도마뱀도 흔했다. 집 안에 들어와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벌레를 잡아먹어줘서 고마운 존재였다. 말 그대로 천연 ‘세스코’였다.
1층 원형 탁자를 지나 뒤쪽으로 가면 작은 화단이 있었고, 거기엔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집 외벽은 하얀 벽이었고, 담장 위를 덮는 넝쿨이 집의 분위기를 더욱 이국적으로 만들었다. 그 분위기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 집엔 손님이 자주 왔다. 현관에는 "Welcome"이라 적힌 카페트가 있었고, 엄마는 손님 맞이로 늘 바빴다.
그런 영향인지, 나도 어른이 되어 누군가를 내 공간에 초대하는 걸 무척 좋아한다. 어릴 때 보고 배우고 느낀 감정들이 이렇게 성인이 된 나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손님들이 오면 언니 오빠들과 함께 놀 수 있어서 좋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엄마의 품은 언제나 따뜻했고, 나는 엄마 냄새를 참 좋아했다. 엄마는 항상 커다랗고 나풀거리며 부드러운 소재의 화려한 패턴 원피스를 입었는데, 키가 작았던 나는 엄마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안기곤 했다. 거기서 맡았던 엄마의 냄새가 너무 좋았고,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 중에는 새알심을 넣은 단호박죽, 홍합탕, 갈치구이를 특히 좋아했다. 한국에 와서 엄마와 빵집에 가면 항상 내가 고르던 빵이 있었는데, 옥수수빵 스틱이었다.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그땐 자주 볼 수 있었다.
엄마는 한국에 와서 심부름도 자주 시켰다. 두부 장수 아저씨가 트럭을 타고 오면, 엄마는 나를 보내서 두부를 사오게 했다. 갓 만든 두부는 뜨거웠지만 정말 맛있었다. 열무김치를 밥에 슥슥 비벼 먹는 열무비빔밥도 자주 해 먹었는데, 그 맛도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때의 기억은 엄마가 살아 있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이기도 했고, 해외에서 기억은 환경이 주는 자유로움과 따뜻함이 컸다. 그곳의 사람들은 선했고, 악의 없이 순수했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매일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날씨였고, 열대 과일도 풍부했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고, 바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여유가 있었고, 느긋함이 있었다.
어릴 때 경험들을 기억나는 대로, 순서에 상관없이 주절주절 써내려가다 보니 이 기억 저 기억이 뒤섞여 조금 복잡하다. 하지만 글을 쓰며 그때의 감정들을 다시 되짚어 보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소중한 시간이자 위로가 된다.
이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겪은 힘든 순간을 버텨낼 수 있게 해준 힘이 되어준 것 같다.